[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의자의 저주
입력 2013-01-11 17:55
스승 팔라몬이 청년 파코미우스에게 가르쳤던 기독교적 삶은 아주 엄격하고 혹독한 것이었다. 그중의 하나가 ‘모래주머니 철야기도’이다. 밤새 기도하기 전 미리 모래주머니를 여러 개 준비해 놓아야 한다. 늦은 밤이 되어 육체의 피로가 기도의 집중을 방해하면 이쪽의 모래주머니를 저쪽으로 옮기고 또다시 저쪽 모래주머니를 이쪽으로 옮겨 잠을 쫓아내면서 기도해야 한다. 모래주머니 철야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 16:24) 그리스도를 따르는 팔라몬 식의 십자가 신학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표시
지나친 수덕의 결과일까, 스승 팔라몬은 얼마 안 되어 병들고 말았다. 의사가 왕진하여 처방을 내놓았다. 몸을 너무 혹사시켜 간이 나빠졌으니 음식을 잘 섭취하고 푹 쉬어야 한다는 처방이었다. 그에 따라 파코미우스는 정성스럽게 고기 수프를 준비해 팔라몬에게 가져갔다. 하지만 수프를 맛본 팔라몬은 고기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수프를 거절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고전 2:2) 고기를 먹으며 몸을 건강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팔라몬은 의사의 처방을 무시하며 오히려 이전보다 더 혹독한 방식으로 수덕에 매진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팔라몬은 세상을 떠난다.
팔라몬에게는 분명 지나친 면이 있다. 그러나 4세기는 영적으로 강한 자는 육체를 돌보지 말아야 한다는 팔라몬 식의 십자가 신학이 널리 공감을 얻던 시대였다. 4세기의 대표적인 삼위일체 정통주의 신학자였던 바실리우스는 이렇게까지 말하기도 했다. “건장한 체격과 좋은 혈색이 운동선수의 표시이듯, 없이 사는 결과로서 몸이 여위고 창백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표시이다.” ‘몸이 여위고 창백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시라니, 몸이 점점 불어가고 커져가는 것과 신앙을 전혀 무관하게 보는 우리로서는 아주 낯선 해석이다. 바실리우스의 입장은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10)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고문헌학자이기도 했던 철학자 니체가 기독교가 육체의 건강을 도외시하고 그 허약함을 찬양한다고 비판한 것은 역사적으로 그럴 만한 근거가 없지 않다.
육체의 쇠약 속에서라야 영적으로 강해진다는 4세기의 십자가 신학에도 불구하고 병원이 바로 이 시대의 수도원과 교회에서 탄생하고 발전해갔다는 것은 놀라운 역사적 사실이다. 파코미우스의 수도원에는 약국과 입원실이 있었다. 바실리우스도 입원병동과 의사와 간호사용 숙소까지 갖춘 사회복지 콤플렉스를 372년 창립했다. 예수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치료하신 의사(마 9:12)로 이해되었기에 예수의 제자들이 인간의 병든 육체를 돌보고 영혼을 치료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마 25:36).
4∼15세기까지 서양과 비잔틴 역사에서 병원의 절대적인 운영주체는 수도원과 교회였다. 서양의 경우 시의회와 국가가 병원운영에 개입하는 것은 16∼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아울러 그리스 의학서는 500년경 시리아어로 번역되어 동방으로 퍼져 나갔다. 6세기 중반경 니시비스(Nisibis)에 있던 시리아 기독교의 신학교에서는 의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시리아어로 번역된 의학서적 덕분에 페르시아와 아랍 세계에서 의학은 기독교의 전유물이 되었다. 페르시아 기독교의 카톨리코스(대감독)였던 요셉(552∼567년) 같은 인물은 의사이기도 했으며, 페르시아나 아랍 세계의 병원은 기독교인들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지난 주말 이후 나는 몸과 신앙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허리에 도진 담 때문이다. 담으로 인한 디스크는 줄잡아 약 10년 동안 나를 괴롭힌 질병이다. 한번 삐끗하여 척추길이끈을 비롯한 주요 근육이 몇 군데 뭉치면 4∼5번 디스크가 눌려 꼼짝없이 나는 식물인간이 된다. 무얼 잡지 않고는 누웠다가 일어나기조차 쉽지 않다. 재채기하는 것도 두렵고 웃기는 것은 더 두렵다. 통증 때문이다. 통증이 제일 심한 것은 의자에 앉는 자세이다. 칼로 근육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두려워 감히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있질 못한다. 지금 이 글도 3분 동안 앉아서 쓰고 3분 일어나서 쉬고 하는 식으로 겨우 써내려가고 있다. 이 정도면 ‘의자의 저주’라고 할 수 있으리라.
건강, 영혼의 평화
그런데 왠지 올해에는 ‘의자의 저주’에서 점차 벗어나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다. 무엇을 이루고자 경직되고 긴장하는 내 마음의 자세를 돌이켜서 편안하고 차분한 마음에 이른다면, 또 그런 마음의 소리가 나의 굳어진 근육에까지 전해진다면 내 몸 전체는 한결 부드러워지고 ‘의자의 저주’는 떠나가리라. 영혼을 돌본다고 모든 질병이 고쳐질 수야 없겠지만 영혼을 돌봄으로 고침에 이를 병도 있다. 육체를 허황되게 단련하거나 모질게 학대할 필요는 없지만 건강할 필요는 있고, 건강이란 영혼의 평화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기독교 전통 속에서 병원이 탄생했다는 과거의 역사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 영혼의 평화가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 속에 건강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믿음을 이번 기회에 새삼스럽게 한 것이 감사하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