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배려의 삶 이황, 조선의 페미니스트였다”… ‘퇴계처럼’ 낸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

입력 2013-01-10 18:29


맏며느리의 생리불순을 걱정한 시아버지가 약을 지어 보냈다. 아들에겐 차도를 묻는 편지를 보내곤 “아내를 챙기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 다정다감한 시아버지는 놀랍게도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1501∼1570)이다. 남녀유별과 장유유서, 반상(班常)의 질서가 엄혹했던 시대다. 퇴계는 이런 신분질서를 공고화한 유교 문화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유학자의 정점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의외로 다가온다.

김병일(68)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 쓴 ‘퇴계처럼’(글항아리)은 퇴계를 ‘조선의 페미니스트’로 다뤘다는 점에서 자못 흥미롭다. 9일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전 장관은 “퇴계를 키운 할머니와 어머니,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며느리와 손자며느리 등 ‘퇴계의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퇴계는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었다. 조모는 생존해 있었으나 조부는 돌아가셨다. 이 때문에 퇴계의 삶에선 ‘부성(父性)의 부재’가 부각됐다. 김 전 장관은 이를 거꾸로 어머니의 큰 자리, 즉 모성(母性)의 확장으로 해석한다.

“대유학자의 삶을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주려는 건 퇴계 선생이 죽는 순간까지 보여준 타인을 향한 섬김과 배려, 귀함과 천함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아낀 평등사상을 이해하는 데 나침반이 되어주기 때문이지요.”

퇴계의 두 번째 부인 권씨는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도포의 해진 부분을 붉은 천으로 꿰매주었는데, 사람들은 웃었으나 퇴계는 개의치 않고 입고 다녔다. 신랑과 신접살림을 차려보기도 전에 과부가 된 둘째 며느리가 안쓰러워 시대적 통념을 깨고 개가를 권했던 이도 퇴계였다.

이런 독특한 퇴계 해석은 공감을 자아내는데, 저자가 책 출판 전 현장에서 확인한 것이다. 통계청장, 조달청장, 기획예산처 장관 등을 지낸 그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 2008년부터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으로 일한다.

“맞아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일반인 대상으로 퇴계의 삶에 대해 강의할 때 사람들이 가장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도 그거였지요.” 강의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에서 이뤄진다. 예컨대, 퇴계의 맏며느리 봉화 금씨에 얽힌 일화는 그녀의 묘소 앞에서 이야기하는 식이다. 그녀는 퇴계의 인품에 감동해 “시아버지의 무덤 아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퇴계의 위대함은 실천의 강도에 있다. 퇴계가 아꼈던 맏손자 이안도가 고대하던 아들을 두게 됐다. 한데 서울 사는 손자며느리가 젖이 부족했다. 마침 안동 사는 여종 학덕이 아이를 낳자 유모로 올려달라고 손자가 청한다. 퇴계는 “아기만 둔 채 학덕이만 올려 보낼 수 없다”며 “남의 자식을 죽여서 자기 자식을 살리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고 꾸짖는다. 결국 그 증손자는 죽었다.

김 전 장관은 “지덕체(智德體)가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요즘에는 지식 일변도여서 덕과 인성을 소홀히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퇴계는 시대를 건너 뛰어 우리에게 세상은 함께 가야 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선 섬김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가르친다”고 현재적 의미를 전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