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상식과 배려

입력 2013-01-10 18:48


지난 주일 전 프로야구선수 조성민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교회에 다녀와 스마트폰을 켜보니 인터넷 뉴스창에 벌써 관련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했고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죽었는지. 온 국민이 다 알고 있고 심지어 바다 건너 일본인들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그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그 비극적인 결말까지 빠지지 않고 ‘특집’, ‘집중분석’이란 이름으로 뉴스창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의 원인제공자로 인터넷상 악플러들을 지목하며 그들이 고 최진실 남매에 이어 고인까지 벼랑 끝으로 밀어버렸다고 탓하는 기사가 재탕, 삼탕으로 실렸다.

위화감이 들었다. 작년 12월 폭행사건에 연루된 그를 향해 온갖 억측과 노책(怒責)으로 일관하던 여러 보도매체들이 앞다퉈 그의 짧은 인생과 죽음을 다루며 애도와 포장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을 보니 마뜩찮고 불편했다. ‘베르테르 효과’를 걱정하는 기사가 쏟아지는 가운데 이번에도 여전히 자살보도지침은 지켜지지 않았다.

물론 시청자 또는 독자라고 불리는 국민의 알 권리는 중요하며 그 알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많은 언론인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일부 악플러들의 문제 또한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사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고인이 살아 있을 때 ‘충격’ ‘결국엔’ ‘알고보니’ 같은 자극적 제목을 달고 사실보다는 루머에 가까운 내용을 채워 사흘 굶은 승냥이떼 같은 악플러들에게 던져줬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또 애도라는 이름으로 자살을 미화하고 가족들의 비통한 눈물을 팔아 고인을 죽음의 바이러스처럼 만들어 버린 것은 누구인가 말이다. 구독률, 기사 클릭 수, 시청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함이라는 잔인한 변명은 하지 말자. 권리를 내세우고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보도 행태에 대한 반성이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이번 빈소에서 생일상 폭죽 터뜨리듯 번쩍대는 플래시 세례를 보지 않게 된 것은 참 고맙고 다행한 일이었다. 작년 한 배우의 빈소에서 보도사진기자들이 마음을 모았다고 한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일도 아닌 것이다. 상식과 배려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부디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이 되는 언론인으로서 먼저 돌아보고 변화해 주길 독자로서, 시청자로서 간곡히 부탁드린다.

김희성(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