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쪽빛바다 산호모래, 곳곳엔 슬픈 한국인 초상이… 오키나와로 떠나는 환상의 남국여행

입력 2013-01-09 18:53


한국인 청년 1만명이 뼈를 묻은 원혼의 땅이 있다. 위안부로 끌려온 또래의 한국인 처녀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외로운 섬도 있다. 홍길동 후손으로 알려진 사람의 무덤과 율도국이었다는 섬이 존재하고, 삼별초가 바다를 건너와 정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는 곳이 있다. 한국인의 흔적이 곳곳에 오롯하게 남아 있는 땅은 450년 동안 류큐왕국의 영토였던 일본 오키나와이다.

‘아시아의 하와이’로 불리는 오키나와는 지금 한겨울이다. 그러나 한낮에는 스노클링을 즐길 만큼 따뜻한 남국이다. 도쿄보다 서울이 더 가까운 오키나와는 제주도의 4분의 3 크기인 본 섬을 비롯해 160여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최남단 현. 한반도 유사시 오키나와의 가데나 미공군기지에서 전투기가 이륙하고,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중국 어선이 나타나면 일본 전투기가 발진하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하늘에서 보면 먼 바다에 떠있는 지푸라기처럼 보인다는 뜻의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가장 일본적이지 않은 현이다. 오키나와의 관문인 나하 공항에서 버스나 모노레일을 타고 도심으로 달리다보면 일본을 상징하는 목조주택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산에 나무가 많지 않은데다 태풍이 한 해 평균 16개나 엄습하기 때문에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면 견뎌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역사적으로도 일본과 거리가 멀다. 일본과 대만 사이에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는 오키나와는 오히려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5세기에 오키나와를 통일한 류큐왕국은 1879년 공식적으로 일본의 현이 될 때까지 450년을 독립국가로 살았다. 오키나와 노인들이 일본인 대신 ‘오키나와 사람’을 뜻하는 우지난추로 불리기를 고집하는 까닭이다.

오키나와 관광은 현도인 나하에서 시작된다. 류큐왕국의 수도였던 나하는 붉은 기와지붕이 멋스런 옛 건물과 빌딩이 어우러진 도시로 태평양전쟁 때 미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됐던 곳.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오고 드라마 ‘여인의 향기’ 촬영지라는 안내판을 내건 기념품점 등이 즐비한 1.6㎞ 길이의 국제거리는 전쟁 후 복구를 통해 눈부시게 발전해 ‘기적의 1마일’로 불리는 관광명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나하의 슈리성(首里城)은 옛 류큐왕국의 왕성으로 역대 왕이 머물던 곳. 중국, 일본, 류큐의 건축양식이 혼재한 슈리성은 태평양전쟁 때 대부분 소실됐지만 1992년 일부가 복원됐다. 2000엔 지폐에 등장하는 슈레이몬(守禮門)은 슈리성의 정문으로 성문 아래로 나하 시가지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성벽 아래에 위치한 덴뇨바시(天女橋)는 연못에 설치한 아치형의 돌다리. 15세기 말에 조선의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연못 안에 당집을 집고 다리를 설치했으나 대장경은 오래 전에 분실됐다.

나하의 오키나와월드는 오키나와 최대의 테마파크. 류큐왕국 시대의 거리풍경을 재현한 ‘류큐왕국 성하마을’은 유리, 도예, 베짜기, 빈가타(염색) 등 오키나와의 전통공예를 체험하는 곳. 오키나와월드에 위치한 5㎞ 길이의 교큐센도는 오키나와에 산재한 6000개의 종유동굴 중 최대 규모. 일반에 공개된 890m 길이의 동굴에는 종유석을 비롯해 온갖 생성물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때 23만명이 희생된 최대 격전지. 일본군의 집단자살 현장인 나하 외곽의 마부니 언덕에 조성된 평화기념공원에는 파도를 형상화한 비석에 희생자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그 중에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1만명의 한국 청년 중 신원이 확인된 313명의 이름도 눈에 띈다. 1975년 광복 30주년을 기념해 세운 한국인위령탑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쓴 비문과 이은상 시인의 ‘영령들께 바치는 노래’가 새겨진 비문도 있다.

아열대 바다의 해양생물들을 한눈에 보려면 모토부 반도의 가이요하쿠 공원에 위치한 추라우미 수족관을 찾아야 한다. 1만t 규모의 수족관에는 8.4m 길이의 고래상어 3마리를 비롯해 대형 가오리 등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이 유영하는 환상적인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인어의 꼬리를 연상시키는 마나티(바다소)를 전시한 수족관도 놓치기 아까운 공간. 수족관 옆에 위치한 오키짱극장에서는 돌고래 쇼도 하루 몇 차례 진행된다.

추라우미 수족관에 전시된 열대어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으면 산호초에 둘러싸인 한겨울에도 스노클링이 가능한 바다로 직접 들어갈 일이다. 오키나와는 바다가 유리처럼 투명하고 산호초가 발달한 해양레포츠의 천국. 나하에서 서쪽으로 30㎞ 떨어진 게라마 제도는 스노클링과 스쿠버다이빙을 즐기기에 좋은 섬들이다. 혹은 쪽물을 혹은 잉크를 풀어놓은 듯 푸른 바다를 미끄러지면 도카시키 섬을 비롯해 자마미 섬, 아카 섬, 게루마 섬 등 3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뱃전을 스쳐간다.

도카시키 섬은 오키나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해변과 물빛을 자랑한다. 에메랄드 블루에서 코발트 블루로 짙어가는 아하렌 비치와 도카시쿠 비치는 세계적 수준의 투명도를 자랑하는 스노클링 명소. 밀가루처럼 하얀 산호모래를 배경으로 유영하는 형형색색의 열대어와 산호가 ‘바다 속의 꽃밭’처럼 황홀하다.

천국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카시키 섬에도 전쟁의 아픔은 생채기로 남아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섬 중앙의 산중턱에는 꽃다운 나이에 끌려온 한국인 위안부들을 추모하는 ‘아리랑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일본의 양심’을 부르짖는 일본인 자원봉사자 150명이 1997년 건립한 위령비 앞에 서면 낯선 땅에서 고향을 그리며 아리랑을 부르던 어린 소녀들의 애잔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오키나와(일본)=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