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진원 (7) 두번의 국회의원 출마 권유에도 “정치는 No!”

입력 2013-01-08 18:19


군 관련 기관의 고위 간부였던 그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중 2명을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키로 했다면서 나에게 영등포에서 출마하라고 권했다. 지금과 달리 지역구마다 2명의 국회의원을 뽑을 때여서 여당 후보는 출마만 하면 당선은 따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와 함께 추천된 사람은 대원고속 권영우 회장이었는데, 권 회장은 동대문에 출마해 당선됐고 후일 여당 재정위원장까지 지냈다.

아버지께 상의 드렸더니, 예상했던 것처럼 “역사의 죄인이 되고 싶으냐”며 극구 반대하셨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정치를 하면 아무리 잘하려 해도 결국 죄인이 된다. 절대 정치하지마라”며 내가 정치하는 것을 반대했다. 어쩌면 나한테 그런 기질이 있어보여서 더 우려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말씀대로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몇 차례 더 만나자는 요청이 왔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나가지 않았다. 그쪽에서는 나 대신 노총위원장 출신의 인사를 공천했고 그는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6년 초에는 김종필 총재를 중심으로 새로 창당된 자유민주연합에서 날 찾아왔다. 김 총재는 1995년 3월 민자당에서 탈당, 자민련을 창당하고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정통 보수세력의 대표를 자임했다.

날 찾아온 이는 육군 대장 출신으로 민정당과 민자당 사무총장을 지낸 박준병 의원이었다. 박 의원은 1995년 10월 민자당에서 탈당해 자민련에 합류했다. 지팡이를 짚고 왔기에 어떻게 된 일이냐 물었더니 얼음판에서 넘어졌다고 했다. 박 의원은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으니 일단 도장부터 찍으라”고 재촉했다. “왜 나를 공천하려 하느냐”고 물었더니 “여러 의원들로부터 추천을 받았다”면서 도장만 찍으면 된다고 거듭 다그쳤다.

정치는 절대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놓고는 일본으로 출국해 버렸다. 자민련은 그해 4월 12일 치러진 제15대 총선에서 무려 50석을 얻으며 ‘녹색바람’을 일으켰다. 나도 출마했더라면 당선됐을지 모르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나의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출마 제의는 모두 거절했지만 1991년 실시된 지방의회 선거에는 출마했다. 구 의원의 경우 정치활동이 아니라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그때는 지방의회 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제도가 없어 정치색도 옅었다. 당시 나는 영등포구 구정자문위원장이자 서울시 자문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두 곳 자문위에서 20년 가까이 활동해왔기 때문에 지방자치제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구의회가 구성된 뒤 초대 구의회 의장으로 선출됐는데 2년 임기를 마친 뒤 한 번 더 뽑혀 4년 내리 의장을 지냈다. 감사하게도 동료 의원들은 압도적 표차로 두 번이나 나를 지지해줬다.

의장으로서 한인타운이 속해있는 미국 LA시의회와 자매결연을 하기 위해 미국 방문을 추진한 일이 있었다. 그 무렵 다른 지자체 의원들 중 일부가 나랏돈으로 직무관련성도 없는 집단 외유를 해 물의를 빚는 일이 발생했다. 당초 구 예산으로 33명 의원 전원이 가려 했지만 전액 자비 부담으로 바꿔버렸다. 결국 13명만 다녀왔지만 자비 부담이었기에 떳떳하게 관광일정도 추가했다. 지방의회 의원들의 해외출장에 좋은 선례를 마련했다는 호평을 받았지만 그 후로는 비슷한 사례가 없었던 것 같아 아쉽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