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목사 강의·눈물바다 경건회 생생한데…” 故 한경직 목사 설립 ‘영락여자신학원’ 역사 속으로

입력 2013-01-07 21:02


“우리가 저걸 다 심고 가꿨는데….”(배차순 영락여자신학원 동창회장) “나는 저 십자가 동산 아래서 얼마나 울면서 기도했는지 몰라.”(김문경 동창회 총무)

지난 5일 오후 경기도 광주 중부면 산성리 영락여자신학원 교정. 눈 덮인 교정 이곳저곳을 바라보는 졸업생들의 표정에는 아쉬움과 추억이 가득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 여교역자 양성 교육기관인 영락여자신학원이 4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신학원은 농어촌·미자립 교회와 북한선교 현장에서 헌신할 여교역자를 키우기 위해 1969년 고 한경직 영락교회 목사가 세웠다. 김은섭 영락여자신학원장 직무대행은 “영락교회 당회가 시대 흐름에 발맞춰 신학교 건물을 영성센터로 바꾸기로 결정했다”면서 “지난해 12월을 끝으로 신학원의 모든 업무를 마무리했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신학원에서 배출한 졸업생은 957명. 목사와 전도사, 선교사 등 국내외에서 활동 중인 여교역자는 졸업생의 약 43%(410명)에 달한다. 예장통합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관계자는 “영락여자신학원은 우리나라 신학 교육기관 중 영성과 실력을 겸비한 여성 심방전도사의 산실이었다”면서 “여교역자의 역할이 점점 증대되는 교계 현실에서 여자신학원을 폐교한 것은 너무 성급한 결정인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3년 과정인 신학원은 엄격한 영성·경건 훈련기관으로 유명했다. 24시간 기숙사 공동생활을 하는 학생들은 말투와 걸음걸이, 기숙사의 야간소등 시간까지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했다. 1회부터 43회까지 입학생 대비 졸업생 비율은 평균 73.5%. 10명 중 3명 정도는 중도에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갔을 정도다.

1976년 졸업생인 배 회장은 “가톨릭 수녀원 같은 공동생활이 너무 힘들어 학생들끼리 모여 간증하는 경건회 때마다 울음바다가 됐다”면서 “하지만 이곳에서 예수님을 만난 나로서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79년 졸업생인 김 총무는 “당시 서울 강남의 아파트에 살아서 연탄불을 잘 갈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기숙사에서 혼났던 일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초대 이사장이자 70년대까지 신학원에서 설교학을 강의했던 한경직 목사에 대한 추억담도 하나둘 나왔다. “인자한 인상이셨지만 강단 앞에서 수업하실 때에는 보이지 않는 파워 같은 게 느껴졌어요.”(배 회장)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설교 내용을 다 듣고 나서 ‘내’와 ‘네’ 구분을 잘하라고 세심하게 충고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김 총무)

신학원 교정에는 졸업생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잊지 못하는 추억의 장소가 있다. 십자가 동산이다. 신학원 정문을 가로질러 오른쪽 언덕 끝에 하얀색 십자가상이 세워진 작은 언덕이다. 배 회장은 “신학원에서는 침묵기도만 할 수 있었는데, 유일하게 소리를 내어 기도할 수 있는 곳이 여기 십자가 동산이었다”면서 “마음 속 깊은 얘기까지 털어놨던 이곳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영락교회 측은 이곳 신학원의 상징이자 졸업생들의 추억이 담긴 십자가상은 영구 보존키로 했다.

경기도 광주=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