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권영해 前 국방장관 “6·25 발발보다는 정전 60주년이 더 큰 역사적 의미”

입력 2013-01-07 21:56


“전혀 알지 못하고 만나본 적 없는 나라의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부름에 응한 우리 아들과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기념공원의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다. 한국전에서 희생된 미군들을 기리기 위해 미국 의회가 주도해 만든 이 공원은 정전 42주년 기념일인 1995년 7월 27일 준공됐다.

권영해(76) 전 국방장관은 이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를 말하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 내내 ‘감사’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특히 올해 정전 60주년을 맞이해 한국을 위해 희생한 참전용사와 가족들에게 감사하다는 의미다. 그는 국가 안보와 관련된 생각을 말할 때는 상당히 단호했다. ‘애국’ ‘안보’ ‘나라 사랑’ 등의 단어를 쓰면 ‘수구 꼴통’으로 공격당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할 말이 아주 많은 듯했다. 권 전 장관은 강영훈 전 총리에 이어 2년 전부터 사단법인 우리민족교류협회 총재를 맡고 있다. 국민화합을 통한 사회통합과 민족통일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는 이 단체는 정전 60주년을 맞아 오는 7월 27일까지 6·25 참전 21개국(의료진 파견 5개국 포함)과 비무장지대(DMZ)에서 의미있는 기념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인터뷰는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1시간여 동안 이뤄졌다.

<만난 사람= 김명호 부국장>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8·15 광복도 중요하지만,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 건국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든지 건국일을 가장 중요하게 기념한다. 마찬가지로 6·25 발발 60주년(2010년)도 중요하지만 올해 정전 60주년 역시 그보다 더욱 의미 있고 역사적으로 기억해야 할 날이다.

희생된 국군은 물론이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죽어간 그들을 위해 더 귀하게 승화시켜야 하는 날로 기억돼야 한다. 참전국의 경우 특히 미국은 6·25 발발보다 정전 60주년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 (올해는 한·미동맹 60주년의 해이기도 하다.) 그동안 전직 국방장관 자격으로 여러 참전국을 방문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희생으로 한국의 발전에 일조를 했다는 데 아주 큰 보람을 갖고 있다.”

-구체적인 행사 계획은.

“3월부터 의료진과 전투병을 파견한 21개국을 돌면서 기념행사를 가질 것이다. 비무장지대(DMZ) 행사도 추진하고 있다. 돈만 엄청나게 들어가는 이벤트성 행사로는 하지 않겠지만, K팝 등 인기인들의 재능기부가 많았으면 좋겠다. 참전 군인과 가족 등에 대한 보훈행사이자 우리를 알리기 위한 행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감사’다. 먼저 각 나라 국민들에게 찾아가서 ‘고맙다’는 뜻을 충분히 전해야 한다. 한국전에 가면 죽는 것을 뻔히 알면서 형제와 자식을 보내놓고 참을 수 있었던 국민들을 생각해 봐야 한다. 두 번째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참전 군인들의 자녀와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준다거나 한국에 유학을 원하는 학생들을 도와주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6·25 발발 60주년을 맞던 2010년에 비해 정전 60주년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느낌이다.

“역사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정부가 최소한 2010년의 기념행사만큼 올해도 걸맞은 관련 사업을 해야 한다. 6·25 발발에 대한 것도 역사적 차원에서 기억해야 할 일이지만 정전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 아닌가. 올해는 도와줬던 나라에 감사를 표하고 국내에서도 희생자를 추모하고 더 귀하게 기리는 해로 여겨야 한다.”

-정전에 대한 참전국들의 인식은 어떤가.

“21개국을 포함해 전쟁 이후 한반도 재건을 위한 경제·건설 지원을 다 합치면 67개국 정도 된다. 한 나라의 위기에 67개국이 참여했던 역사가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들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성경에도 보면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것 아닌가. 이러한 기독교적 사랑 정신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실제로 참전국 중 상당수는 미국을 포함해 기독교를 믿는 국가다.”

-정전협정문에 평화협정으로 가기 위한 것이라는 문구도 있는데, 평화체제로 나아가기 위해서 어떤 조치가 필요한가.

“평화협정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겉으로 보면 불안한 안보를 평화로 바꾸겠다는 데 누가 반대하나. 하지만 이것이 전제 없이 남발되고 있는 데 대해서는 우려한다. 평화협정을 함부로 얘기하면 북한을 편들었던 사람들이 노리는 술수에 말려들어갈 수 있다. 평화협정도 정전협정 때 사인했었던 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적어도 양쪽이 이제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자세로 돌아갔을 때 가능하다. 마치 평화협정에 이의를 제기하면 (통일을 반대하는) 수구꼴통으로 매도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을 ‘도발’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맞지 않다. 협정 내용을 보면 양쪽이 서명한 후에는 어떠한 무력적인 행위도 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한쪽의 무력 행위는 ‘공격’으로 간주돼야 한다. ‘도발’이 아니다. ‘도발’에 대한 대응은 ‘억제’ 또는 ‘자제 촉구’ 정도의 소극적 개념이다. 하지만 ‘공격’에 대한 대응에는 ‘반격’이라는 적극 대응을 할 수 있다. 당연히 우리는 반격을 했어야 했다.”

권 전 장관은 이 부분에서 상당히 톤을 높였다.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자국민이 공격당하면 반드시 상응하는 반격을 하거나 응징하는 예를 들었다.

-남북 간 군사적 신뢰 구축이 전제돼야 한다는 얘긴가.

“그렇다. 7·4 공동성명 등 많은 합의를 했는데 지금까지 북한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런 상대와 섣부르게, 그리고 전제가 없는 상태에서 평화협정을 논하는 것은 안 된다. (군사적 신뢰 조치의 핵심은) 결국 핵과 미사일의 포기다.”

-김정은 체제를 어떻게 보나.

“대남 정책에 관한한 김정일이든, 김정은이든 변화가 없다. (유화적) 신년사는 제스처에 불과하다.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김일성부터 적화통일을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핵과 미사일 개발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내부적으로는 김정은이 더 통제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체제 붕괴는 섣불리 얘기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절대권력자는 망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이미 보여줬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이 참전 군인들의 자부심과 이들과 가족에 대한 국가의 예우 수준이었다. 우리와는 좀 다른 것 같더라.

“그렇게 물어봐주니 솔직히 기쁘다. 당연한 것인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미국은 재향군인의 날이 국가 공휴일이다. 미국인 구성을 보면 뭉쳐질 수 있는 요소가 없다. 그런데 애국심이 그들을 하나로 만든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봤나. ‘내가 적군의 포로가 되면 동료가 나를 구하러 올 것이다. 죽는다면 시체라도 데려갈 것이다’라는 생각이 국민들 의식 속에 깔려 있다. 어떻게 애국심이 안 생기겠나. 우리나라는 참전용사 보조금을 ‘5만원으로 할 것인가, 7만원으로 할 것인가’라고 얘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호주의 재향군인회(RSL) 초청 행사에서 저녁을 함께하는데 6시쯤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지금까지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을 위해 묵념하겠다’는 내용의 방송이 나오더라. 밥을 먹다가 모든 사람들이 다 일어섰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국가에 대한 맹세’를 하고 다시 식사를 했다. 늘 그런단다. 국가를 위해서 헌신했던 사람들에 대한 대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권영해 前 국방장관은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당시 첫 국방장관에 발탁됐고 마지막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냈다. 국방장관에 취임하자마자 김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5·6공 실세였던 사조직 ‘하나회’ 장성들을 중심으로 육군 수뇌부를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제거했다. 장관 재임은 10개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기간 단행한 숙군 및 군개혁 작업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하나회 소속이 아닌 그는 소장으로 예편했으며, 소장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장관이 됐다. 뜻하지 않은 장관 낙마에도 불구하고 김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으로 94년 12월 안기부장으로 다시 국가 안보의 중책을 맡았다. 이후에도 계속 군을 사실상 관리하는 등 군과 정보기관을 총체적으로 컨트롤했다. 97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국군중앙교회 장로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

△경북 경주(76) △경주고·육사(15기) △3군 부사령관 △88서울올림픽 지원사령관 △국방부 차관 △국방부 장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국가안전기획부장 △우리민족교류협회 총재

정리=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