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2부) 5년, 새 정부의 과제] 독일 정치사는 좌우파 극단주의 배제의 역사

입력 2013-01-06 20:03


③ 독일식 대타협 정치

독일의 보수, 진보 정치세력은 왜 극단적인 이념 대립의 길을 포기했을까. 그 이유는 과오와 비극으로 점철된 독일 현대사에서 연유한다. 좌우파 정당들은 1, 2차 세계대전으로 수백만명을 희생시킨 장본인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반성의 토대 위에 오늘날 ‘초당적 협력 체제’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독일 내각제가 일본과 달리 안정적인 배경이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진보·보수의 극단적 형태=두 번의 세계대전은 독일 우파가 일으킨 재앙이었다. 프로이센 시대의 보수 정파는 영국·프랑스 중심의 서유럽과 정면 대립했다. 자본주의 도입이 늦어 두 나라에 대한 경제적 종속이 심했던 독일은 1차대전을 일으켰다 패전했다.

우파가 대실패를 겪자 전후 독일엔 ‘좌파 과잉’ 시대가 열렸다. 실업과 저임금에 허덕이던 근로계층에게 온갖 퍼주기식 복지 혜택을 주느라 국가 재정을 탕진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는 국민 전체가 아니라 ‘노동계급 지상주의’에 빠진 사회민주당(SDP)에 의해 해체됐다. SDP 내각은 당내 분파 난립으로 1년 이상을 버티지 못한 채 수도 없이 바뀌었다.

이 사이 인류의 재앙 나치(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가 자라났다. 귀족과 자본가 중심이던 우파는 아돌프 히틀러의 극단적 대중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나치당으로 결집했다. 선거를 통해 집권한 나치는 곧바로 폴란드를 침공했다. 모든 정당 불법화, 유대인 학살 등이 독일 국민의 이름으로 합법화됐다. 독일의 20세기 초반은 민족주의와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는 ‘꼴통 보수’ 그리고 복지 과잉에 전도된 ‘진보 포퓰리즘’의 극단적 정치만이 있었다.

◇뼈아픈 반성에서 출발한 전후 독일 좌우파=2차대전 후 탄생한 서독에선 우파의 기독교민주연합(CDU)과 좌파 SDP가 양대 정당으로 등장했다. 두 정당은 우선 ‘연방 기본법’에 극단주의 정당 배제 조항을 만들어 넣었다. 나치와 극좌세력 등 의회주의와 절차적 민주주의를 추구하지 않는 정당은 정치권에서 영원히 추방했다.

CDU의 콘라트 아데나워 당수와 SDP 쿠르트 슈마허 당수는 각각 보수·진보의 아이콘이 돼 서로 대립했지만 자신들의 노선만을 유일선((唯一善)으로 여기지 않았다. 슈마허는 좌파 내에 공산혁명을 주장하는 극단적 분파 세력을 철저히 배제했다. 아데나워는 우파 내의 우월적 민족주의, 성장 지상주의 같은 강경 보수 노선을 뿌리뽑았다.

두 당은 1950년대 중반 ‘전 국민의 정치 교육화’에도 합의했다. 바람직한 정치 체제를 만들기 위해선 국민 전체가 어릴 때부터 상반된 이념과 논리를 존중하는 정치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보고 정치교육원을 정부 안에 설립했다. 아데나워 재단과 에베르트 재단도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좌우 진영의 정치 엘리트들이 자라났다. 1976년 양당이 주도한 ‘보이텔스바흐 협약’은 정당들이 당원들에 대한 교육에서 교조적 일방논리 주입을 막고 균형적 시각을 갖추며 당사자의 이해관계를 객관화시키도록 했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