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2부)] 위기 때마다 ‘독일식 화학적 정치연대’ 빛난다

입력 2013-01-06 18:40


국익앞엔 똘똘… 권력 나눠먹기 없는 대연정

2005년 11월 총선을 치른 독일에선 진풍경이 벌어졌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총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SDP)과 앙겔라 메르켈 당수의 기독교민주연합(CDU)이 서로 총선 승리를 주장한 것이다. 최종 집계 결과 연방 하원 의석은 CDU가 SDP보다 4석 앞섰다. 그때부터 연립정부(연정) 협상이 시작됐다.

◇좌우 연정은 국가를 위한 진정한 기회 제공=승리한 CDU는 군소정당들이 아닌 SDP와의 연정을 원했다. 팽팽한 좌우 균형이 독일 국민의 뜻인 만큼 대연정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한 달 이상 정책연합 협상이 진행돼 1000페이지의 대연정 합의문이 만들어졌다. 총리에 취임한 메르켈은 “대연정은 독일을 위한 진정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두 정파는 원자력발전소 가동 기한에 대해서만 서로 의견이 대립했지만, 이를 논의 대상에서 제외한 채 연정을 구성했다. 좌우 동거내각은 다음 총선까지 4년간이나 지속됐다.

2005년 이전에도 정책 지향점이 서로 다른 여야가 연합하는 대연정이 있었다. 1966년 12월부터 1969년 9월까지 약 3년간 CDU와 제1 야당 SDP는 대연정을 구성했다. 보수정당 CDU의 20년 장기집권이 진행 중이던 당시 서독은 정부 재정적자 확대, 실업자 급증, 노사분쟁 심화 등 심각한 경기침체에 직면했다. 네오나치즘에 대한 우려 역시 고조됐다.

우파는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거대 야당인 SDP와의 대연정을 추진했다. 25일간 협상 끝에 차기 총선까지 연정 지속, SDP 당수 빌리 브란트의 부총리 입각 등을 포함한 권력 배분 합의를 이뤄냈다. 당시 대연정을 발판으로 브란트는 1969년 집권 후 동방정책을 추진했고, 이는 독일 통일의 기반이 됐다.

중앙선관위연수원 신두철 박사는 “사회 전체의 위기 때마다 나온 독일식 대연정은 형식적인 정권 나눠먹기가 아니라 좌우 정치세력의 화학적 정치연대였다”면서 “이후 CDU와 SDP는 경쟁과 협력이 조화를 이루는 관계가 됐다”고 설명했다. 독일에서 연정이 지속되는 이유는 안정적인 5당 체제가 유지돼 어느 정당도 과반 의석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두 당은 헌법격인 ‘연방 기본법’을 만들 때도 정파를 초월했다. 특정 정치성향·종교·인종을 혐오하는 세력은 정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극단주의 정당 배제’ 조항과 총선에서 5% 이상 지지율을 얻지 못한 정당의 해산 조항 등을 삽입했다. 극좌 세력과 네오나치 같은 극우 정당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공천 파동 없는 상향식 정치제도=독일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한 상향식 정치가 이뤄진다는 점이다. 상향식 정치 제도는 법으로 뒷받침된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한국 정치 특유의 공천 파동은 없다.

독일 연방 하원의원에 입후보하는 지역 선거구 후보들은 연방 하원의원 선거법 21조에 따라 지역구 당원 총회와 대표자 회의의 비밀투표로 결정된다. 중앙당 공천이 아니라 젊은 나이에 일반 당원으로 가입해 활동하다 역량을 인정받으면 중앙 무대로 진출하는 식이다.

여기엔 여러 이점이 있다. 중앙당은 뛰어난 정치 감각을 지닌 인재를 키울 수 있고, 정치비용 역시 최소화할 수 있다. 각 지역에서 풀뿌리 민주정치를 경험한 인사들이 이런 절차를 거쳐 정치 엘리트로 성장하는 것이다.

높은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정치 출발점 역시 일반 당원이었다. 그는 소수당의 당원으로 가입한 뒤 역량을 인정받아 중앙무대로 진출했다.

독일 선거제도는 유권자들의 사표를 최소화하고 승자독식제를 방지할 수 있는 보완장치를 갖추고 있다. 유권자는 투표권을 2개 갖는다. 연방 하원의원 정수 598명 중 299명은 지역구에서 주민들이 직접 뽑고, 나머지 299명은 비례대표 원칙에 따라 각 주의 정당별 후보자 명부 순위에 따라 선출된다. 다만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의석수가 늘어나기도 한다. 2009년 치러진 17대 총선에선 598명 외에 24석이 추가로 생겼다. 현재 하원의원 정수는 622명이다.

비례대표 선출방식은 소선거구제 약점인 사표를 방지하고, 정당 득표율에 맞은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의를 더욱 충실하게 반영한다는 평가가 많다. 정당은 지역감정이나 인맥에 의존한 선거운동을 하지 않고, 전국 차원의 정책 선거를 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또 전문가들의 의회 진출을 독려하는 이점도 있다.

남혁상 기자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