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현미] 다시 행진이다

입력 2013-01-06 18:32


새해가 밝았다. 누구나 공평하게 한 살 더 나이를 먹었고 한 살 더 나이를 먹은 만큼 우리는 지혜로워지려나. 그러길 오빠도 바라고 나도 바라자.

지난 연말 ‘들국화 2막 1장 앙코르’ 콘서트에 다녀왔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였고 기상청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예보하고 있던 아주 추운 날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즐거워 보이고 그러거나 말거나 캐럴은 울려 퍼지고 그러거나 말거나 네온사인은 화려하게 빛나던 밤인데 콘서트 장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아들 녀석의 어깨만 유난히 추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은 곧 고3 예비 수험생이 되기 직전의 상황이라는 것. 입시라는 말만으로도 지옥을 당연하게 연상하는 우리네 현실에 비춰볼 때 이제 곧 그 지옥과도 같은 무대의 주인공으로 서야 하는 아들 녀석에게는 이 기록적인 한파로 인한 추위보다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라는 지옥이 더 두렵고 추운 건지도 모를 일.

이럴 때 엄마는 ‘원더우먼’이 되고 싶다. 아들이 원하는 것이 타임머신을 타고 수능시험 마친 1분 후로 날아가는 일이라 해도 들어주고 싶다. 그러나 ‘난 네가 바라듯 완전하지 못해. 한낱 외로운 사람일 뿐’이라서 몹시 안타깝고 미안할 뿐. 일하는 엄마라 한 번도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를 반갑게 맞아주지도 못했고 고액 과외를 시키거나 해외 어학연수를 보내줄 꿈은 꿔본 적도 없는 평범에도 못 미치는 엄마라는 거.

하지만 그날 공연장에서 연일 뉴스에 보도된 전력난 때문인지 갑자기 정전이 됐을 때 아무도 그 캄캄한 어둠을 불안해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관객들은 저마다 스마트폰을 꺼내 무대의 어둠을 밝혔고 ‘갱생의 아이콘’으로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전인권 오빠는 마이크 없이 노래를 이어갔다. 그야말로 각자 자기의 역할에서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감동의 순간이 연출되었다. 그 잊지 못할 감동이야말로 앞으로 아들이 시련을 겪거나 추울 때 내가 아들에게 한 코 한 코 떠 주고 싶었던 목도리이고 벙어리장갑이고 슈퍼맨의 망토 같은 것이라는 걸 아들은 눈치 챘을까.

또 새해다. 그러나 시련은 다른 일로 먼저 닥쳐왔다. 계속되는 한파로 월세 들어 살던 다세대주택 우리 집 보일러가 고장 나 버린 것.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방바닥은 냉골이다. 춥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쓰여져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다시 새해다. 다시 행진이다.

안현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