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진원 (5) 서른둘 젊은나이에 영등포 약사회장 출마 당선

입력 2013-01-06 17:48


대학을 졸업한 뒤 군에 입대했다. 약사여서 광주 상무대 77육군병원에 배치받았는데 병원 일이 아닌 서무 일만 시켰다. 10개월 정도 근무하다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카투사로 차출돼 서울 용산의 미군 통신대대로 옮겼다. 여기서 함께 근무한 동기 중 한 사람이 안정남 전 국세청장이다. 나이는 나보다 어렸는데 똑똑했던 기억이 난다. 통신대대에서는 일부러 일주일에 이틀 철야근무를 하는 보직을 지원했다. 철야근무를 하는 대신 나머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군에 있으면서 결혼도 하고 약국도 개업할 수 있었다.

아내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오류동장로교회 박선택 목사님의 딸이었다. 장인은 북한이 고향으로 월남해 오류동장로교회를 세우고 은퇴할 때까지 시무하신 분이다. 노회장을 두 차례나 지내실 정도로 신망도 높았다. 고 한경직 목사님과도 친분이 두터웠는데, 두 분 고향이 같았던 데다 한 목사님이 192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장인이 뱃삯을 보탰다고 한다. 장인이 소천하셨을 때 한 목사님이 문상 오셔서 들려주신 이야기다. 한 목사님은 미국으로 건너가 캔자스주의 엠포리아대학을 마치고 프린스턴 신학원을 졸업한 뒤 1932년 귀국했다.

아내는 당시 숙명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고용약사로 일하고 있었다. 신혼에 남편이 군에 있었으니 고생이 많았다. 이후에도 사회활동하고 봉사한답시고 밖으로만 돌아다니면서 아내 고생을 많이 시켰다. 그런데도 불평 한 번 하지 않고 순종했다. 나를 대신해 약국을 지키던 아내는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는데, 7년 전 자궁암 3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님 은혜로 성공적으로 수술받고 더 이상 전이 없이 완치됐다. 허약해진 아내는 다리가 골절돼 고관절 수술까지 받았다. 기도하는 중에 ‘착한 아내 너무 고생시키지 마라’는 응답을 받았다. 지금은 아내를 쉬게 하고 내가 약국 운영을 도맡아 하고 있다.

서른둘에 서울시 영등포구 약사회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선거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모교인 중앙대 약대 교수들까지 휴강을 하고 투표하러 왔다. 임영신 총장이 이 사실을 알고 교수들을 불러서 혼을 냈다. 죄송한 마음에 임 총장을 종종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임 총장은 유력 정치인들이 인사하러 오면 꼭 나를 불러서 “정 회장. 이분들 잘 도와드려”라며 인사를 시키곤 했다. 이때 소개받은 분 중에 박충훈 전 국무총리서리와 장덕진 전 농림수산부 장관도 있었다. 두 분은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 공화당 공천으로 출마했는데, 야당 바람이 거세게 불어 고전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장 전 장관은 나와 둘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정 회장, 내가 말이야, 어떤 여자가 표 하나 주겠다고 하면 치마폭에라도 뛰어들 것 같아”라고 토로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원래 무엇이든 맡으면 대충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약사회장도 그랬다. 주로 하는 일은 약화사고 처리였다. 당시에는 약사들이 직접 주사까지 놓던 시절이어서 주사 맞거나 약 먹고 사망하는 사고가 간간이 발생했다. 더구나 관할지역인 봉천동은 도심개발로 쫓겨난 철거민들이 거대한 판자촌을 형성하면서 주거환경이나 치안이 엉망이었다. 이런저런 시빗거리를 만들어 약국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떼를 쓰는 사람이 많았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다 보니 수습을 위해 서울지검 영등포지청을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려야 했다. 덕분에 영등포지청에 근무했던 엘리트 검사들을 자주 만났는데, 신건 전 국가정보원장. 안강민 전 대검 중수부장과도 이때 친분을 쌓았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