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전정희] 혁명과 치매

입력 2013-01-04 19:19


‘4·19가 나던 세밑/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반갑게 악수를 나누고/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하얀 입김 뿜으며/열띤 토론을 벌였다/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문제 때문에/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김광규 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중에서)

50대 이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시 한 구절에 가슴이 저밀 것이다. 대통령선거 후유증이 소리 없는 한파와 같다. 이긴 자는 왠지 파티를 해선 안 될 것 같고, 진 자는 소리 내 울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우리는 정치가 개인의 삶을 규정하기 때문에 저마다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행사했다. 그런데 예전 대선 직후와 확연히 다른 공기의 밀도가 느껴진다. 바로 세대간 갈등 때문이다. 세대 간 너무나 다른 선호 후보 지지는 ‘20·30세대 vs 50·60세대 전쟁’으로 표현될 만큼 사회 갈등 요소가 돼버렸다. 불편한 진실이다.

이 진실은 미디어가 만들어 낸 이슈가 아니다. 고령사회로 치닫는 한국이 담론으로 내놓고 풀어야 할 키워드이다.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14%가 넘어가면 고령사회라고 하는데 우리는 2018년이면 고령사회에 진입한다. 일본은 1994년 진입했다. 이 고령사회가 되면 노인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점 커진다. 따라서 이번 50·60세대의 투표 행위를 단순한 ‘국가 안보를 볼모로 한 기득권 유지’로 보아선 안 된다. 장수 국가로 진입한 국민으로서 생체 리듬을 조율해 나가는 본능적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그 본능이 ‘학습된 안정’을 택했다.

이들 세대는 6·25 전쟁을 직접 체험한 세대가 아니다. 그 아버지 세대에겐 이들 또한 20·30이었다.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처럼 조국을 위해 혁명을 꿈꿨으며 자신을 위해 사랑과 아르바이트를 챙겼다. 요즘 청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다. 다만 지독히 가난해 고학으로 자수성가해 자식만은 굶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이들의 개인사는 곧 오늘날 ‘경제대국 한국’의 현대사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그 자식들이 허탈하다. 굶어본 적 없고, 원하는 것 손에 쥐고 살았는데 뭔가 많이 부족하다. 저마다 목청껏 노래를 부르나 헛헛하다. 이들에겐 목표에 대한 상실감, 즉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절박함이 묻어난다. 부모 세대와 달리 계층 이동사다리가 줄어들었고,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 듯한 부의 세습은 그들을 우울하게 한다. 또 자수성가한 부모 세대와의 소통 부재는 그들을 답답하게 만든다. 늘어나는 복지비용은 불만스럽다. 비정규직 ID카드는 함축된 불만의 팻말일 수밖에 없다. 이런 그들에게 “내가 너희만했을 때는…”이라고 시작한다면 ‘자수성가’한 50·60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박정희식 권위주의를 체험한 바 없는 ‘신인류’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힐링’이 필요한 때다. 투표 열기가 가시지 않은 시점이고, 새 정부가 출범하기 전이므로 잠시 침묵하는 것이 좋겠다. 영화 ‘아무르’와 ‘레 미제라블’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지금과 같은 냉기류를 데울 수 있는 힐링 작품이다. 자식이 있음에도 치매 걸린 아내를 늙은 남편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내용의 ‘아무르’, 불의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그 바리케이드 넘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레 미제라블’. 두 세대가 역선택해 이 영화를 본다면 내 부모를, 내 자식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작품이 예술 및 일반 영화 부분에서 최고 인기 작품인 이유가 있다.

전정희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