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시대마다 말씀이 있다
입력 2013-01-04 18:27
어린 시절 내가 태어나고 자란 강원도 산골의 예배당에 붙곤 했던 표어 중 하나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였다. 나의 모교회뿐 아니라 80년대를 전후한 시대, 많은 교회들이 이 구절을 표어로 내걸곤 했다. 이 구절은 욥의 친구 빌닷이 욥을 책망하는 중에 한 말이다. 빌닷은 욥의 자식들이 지은 죄가 컸기에 버림받았고 욥이 부정했기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욥이 깨끗하고 정직하면 처음에는 그의 가정이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라고 인과응보론을 펼친다(욥 8:6). 인과응보로는 의인의 고난이나 십자가 수난을 조금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 빌닷이 하나님께로부터 책망 받는 것은 당연하다(욥 42:7). 전후맥락을 살피면 비꼬는 건지 축복인지 모호한 빌닷의 말을 뚝 떼어내어 표어로 삼곤 했던 것은 왜 그런 것일까.
말씀 달라지면 시대도 달라진다
하박국의 기도를 생각해 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합 3:2) 교회나 기도원 건축, 총동원 전도나 신자 배가 운동 등에 몰입하던 시절, 하박국 3장 2절은 힘에 부치거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믿음에 의지해 이루고자 원했던 자들의 염원을 담아내곤 했었다. ‘잘 살아 보세’로 표현되는 경제성장의 시대와 맞물려 하박국 3장 2절은 교회의 플랜카드에 장식되곤 했고 이런 맥락에서 욥기에 나오는 빌닷의 말도 두서없는 인기를 누렸던 것이리라. 그러나 장기간의 저성장이나 장차 마이너스 성장까지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르는 시대에 이런 구절들이 예전 같은 지지를 받기는 쉽지 않다.
시대가 다르면 말씀도 달라진다. 7∼15세기까지 중세 서방 교회의 바탕이 되었던 말씀을 꼽으라면 마태복음 16장 16∼18절을 들어야 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울 뿐 아니라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는 구절이다. 천국문의 열쇠를 갖고 있는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운 로마 교회의 지도자였고 로마에서 순교했다. 따라서 베드로의 도움으로 천국문을 통과하려면 베드로의 지상 후계자들인 로마 교종(교황)의 권위를 따라야 한다.
중세 기독교는 마태복음 16장 16∼18절을 근거로 이런 논리를 펴면서 교종(교황)의 지상권을 확립해 나갔다. ‘카놋사의 굴욕’에서처럼 군주가 교종에게 무릎 꿇고 참회했던 일화는 마태복음 16장 16∼18절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역사의 일부이다. 이 구절에 바탕을 둔 중세의 우매한 믿음은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교종에게 엄청난 규모의 땅을 수여했다는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같은 날조된 문서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 교종이 왕처럼 통치하는 지역을 만들어 내는 데에 일조하기도 한다.
말씀이 달라지면 시대도 달라진다. 베드로 수위권(마 16:16∼18) 위에 세워진 중세의 철옹성을 마르틴 루터가 깨어 부수는 데에는 ‘오직 믿음으로’(롬 1:17)라는 한 구절 말씀이면 충분했다. 루터 이후 개신교는 오백년 동안 로마서 1장 17절을 성경 속의 성경으로 삼아 개인의 믿음이라는 영혼의 힘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했다. 이로써 종교개혁은 개인을 중시하는 근대문명의 초석을 놓았고, 이는 교회의 가르침에 절대권을 부여하던 중세교권주의 사회와는 그 뿌리부터 다른 것이었다.
4세기 사막 구도자들이 생겨나던 때에는 어떤 구절이 시대의 말씀이었을까. 놀랍게도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라’(마 19:21)는 말씀이다. 4세기의 유명한 인물이나 기독교 지도자들치고 마태복음 19장 21절에 영향 받지 않은 자는 없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요구하는 복음적 가난을 가장 순수하게 실현하기를 원했던 사막의 구도자들은 곧 사라졌다. 수도원이 존속하여 오늘날까지도 내려오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수도원은 언제나 부유하였다.
평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말씀
순수한 의미의 복음적 무소유 혹은 복음적 가난이 사막에 그림자만 비취고 사라진 것은 소유욕이라는 이름의 죄 때문이다. 복음적 무소유란 원죄 이전의 에덴동산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에덴의 낙원에서는 땅과 바다와 하늘과 그 속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었다. 하지만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은 소유욕으로 인한 파국을 막기 위해 사유재산제를 만들 수밖에 없었고 오늘날 우리도 원죄의 결과 만들어진 ‘내 것’의 맛을 느끼거나 탐닉하며 살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나로서는 마태복음 19장 21절의 말씀이 실낙원을 가리키는 에덴의 등불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시대의 말씀은 무엇이어야 할까. 시대의 말씀이 어떠하면 사회도 그러하다. 우리가 사는 곳을 평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말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줄 수 있는 말씀, 그런 말씀이 우리 시대를 가득 품기를 새해 벽두에 간절히 소망해 본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