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이 만드는 소셜 축제] 엉뚱한 상상 유쾌한 도전
입력 2013-01-04 18:42
지난해 8월 30일 디지털 카메라 커뮤니티 SLR클럽에 ‘흔한 군필자의 허세’라는 글이 올라왔다. ‘24인용 군용 텐트를 혼자 설치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다소 엉뚱한 글이었지만 논쟁을 촉발했다. 군 전역자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과장된 군대 경험담이 곁들여지며 점차 격해지더니 나중에는 설전으로 이어졌다. 국내 1호 소셜 페스티벌(네티즌의 자발적 참여로 만드는 축제)로 주목을 받은 ‘T24’의 서막이었다.
‘현피’의 유쾌한 진화
논쟁 초반부는 무게 200㎏에 달하는 텐트를 혼자 세울 수 없다는 의견의 네티즌 다수가 ‘가능하다’라는 소수의견을 비난하는 양상이었다. 빈정거림과 욕설이 난무했고 감정싸움으로 번졌다. 현피로 번져도 이상할 게 없는 지경이었다. 현피란 현실과 PK(Player Kill·플레이어 킬)의 합성어로 채팅·게임 등 온라인 공간에서 벌어진 다툼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지는 것을 뜻한다. 일부 네티즌들이 종종 폭력사태를 야기해 인터넷 문화의 그늘로 자주 거론된다.
육군 부사관으로 8년간 복무했다는 아이디 ‘Lv7 벌레’가 남긴 ‘되는데요’라는 댓글이 전환점이었다. 텐트를 구해주면 공개적으로 설치하겠다며 50만원 내기를 걸었다. 이웃 커뮤니티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이어 국방부도 ‘힘들다’는 의견을 내 불을 지폈다. 텐트의 T를 붙여 ‘T24 소셜 페스티벌’로 명명된 이벤트는 9월 8일 오후 2시로 정해졌다. 자원봉사·재능기부자와 업체 협찬이 이어졌으며 연예인까지 자발적으로 공연하겠다고 나섰다.
유쾌한 도전이자 축제가 펼쳐졌다. 도전 현장인 서울 신월동 한 초등학교에는 3000여명이 모였다. 인터넷 실시간 중계 사이트는 폭주했다. 도전 결과는 Lv7 벌레의 성공.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던 텐트 용마루(대들보 기능) 작업이 마무리되자 환호성이 터졌다. 이후 Lv7 벌레의 댓글 ‘되는데요’는 당일 있었던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덮어버릴 정도로 회자되며 인터넷을 뒤덮었다.
플래시몹의 독특한 형태
크리스마스이브인 지난달 24일 여의도 등 15개 시·도에서 개최된 ‘솔로대첩’은 T24와 과정이 좀 다르다. 솔로대첩은 한 대학생이 페이스북에 올라온 단체 미팅을 제안했고 이성을 갈망하는 솔로들이 호응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연예인·유명인이 참가 의사를 밝히면서 대형 축제로 발전하게 됐다.
성범죄 우려와 남녀 성비 불균형 등이 드러나면서 평가는 엇갈렸다. ‘시도는 좋았다’는 옹호론도 있지만 ‘공명심에 눈먼 주최자에게 이용됐다’는 비판론이 더 많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에 여의도에만 1000여명, 전국적으로는 3000여명이 모였다. 예상 인원(4만여명)에 훨씬 못 미치는 수치지만 보기 드문 볼거리였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솔로대첩 제안자 유태형(24)씨는 밸런타인데이와 ‘커플대첩’ 행사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T24가 ‘말다툼→내기→호기심 유발→축제’ 과정이었다면 솔로대첩은 대학생의 제안이 네티즌들의 욕망과 호기심을 자극했다. T24를 통해 다툼이 축제로 승화됐다면 솔로대첩은 ‘플래시몹’이 축제로 발전한 형태에 가깝다. 플래시몹은 불특정 다수의 네티즌들이 약속 장소에 모여 짧은 시간 황당한 짓을 한 뒤 흩어지는 행위다. 유럽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다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개인화의 단면으로 설명한다. 신 교수는 “개인화는 오락성을 추구한다. 눈치 안 보고 자기가 좋으면 한다는 것”이라면서 “사회로부터 받는 규범적 압력의 약화로 개인화 경향이 강해지면서 자유분방한 플래시몹이 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 우리 특유의 단체미팅 문화와 결합해 솔로대첩, 내기문화가 가미돼 T24로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네티즌은 준비돼 있었다
네티즌들은 판을 벌이는 내공을 쌓아가고 있었다. T24와 솔로대첩은 그동안 준비의 결과였다. 자동차 동호회 커뮤니티인 ‘보배드림’ 게시판에서 2011년 10월에 일어난 ‘보배드림 민간기어’라는 이벤트가 있었다. 민간기어라는 말은 해외 TV 프로그램 ‘탑기어’에서 따왔다. 신형 프라이드, SM3, 쉐보레 크루즈 차주들이 서로 제 차종의 힘이 세다며 입씨름을 벌이다 대결이 벌어졌다. 차량의 뒷부분을 줄로 묶고 벌이는 줄다리기 방식이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차량 파손을 우려했다. 결과는 프라이드의 승리였지만 참가자 모두 손실이 컸다. 차량 3대 모두 차대가 휘어졌다는 후문이다.
같은 커뮤니티에서 2009년 9월 있었던 ‘보배드림 옥수수 사건’도 흥미롭다. 두 차주가 성능을 과시하다 고속도로 부산∼울산 구간에서 레이스를 펼치기로 했다. 500만원이 걸렸다. 정작 대결은 당사자 한 명이 나타나지 않아 무산됐지만 후유증은 컸다. 경찰이 불법 개조 차량 단속에 나서기도 해 관중들이 곤욕을 치렀다. 한 네티즌은 현장에서 팔려고 옥수수 200여개를 삶아 왔다가 대결 무산으로 끼니마다 옥수수만 먹고 있다는 하소연을 올려 웃음을 자아냈다. 스피드 레이스가 옥수수 사건으로 불리는 이유다.
마녀사냥 놀이는 이제 식상
같은 해 12월 한 커뮤니티에서는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삼겹살을 구워먹겠다고 한 네티즌의 너스레가 실제 이벤트로 번졌다. 다른 네티즌이 “그럼 난 그 옆에서 노래 부르겠다”, 또 다른 네티즌이 “그럼 탬버린으로 박자 맞추겠다”며 호응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26일 명동에 운집한 인파 속에 3인의 젊은이가 각각 삼겹살을 굽고, 무반주 노래를 부르고, 탬버린을 두드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터넷에 답답함을 느낀 네티즌들이 현실세계로 뛰쳐나오고 있다”며 “마녀사냥, ○○녀 등 부정적인 것에 식상해진 사람들이 다른 흥밋거리를 찾고 있으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벤트로 연결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네티즌 스스로 만나는 목적과 이유를 만든다는 점도 과거 네티즌의 현실참여와 구분되는 점이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오프라인에서 촛불집회나 월드컵 거리응원 같은 정치·스포츠 이벤트를 만들면 네티즌이 호응하던 것이 과거 버전이라면 현재는 사건 자체를 사이버 공간에서 만들어버린다”고 말했다.
신광영 교수는 “인터넷의 다양한 속성이 발현되는 과정”이라며 “호기심과 유쾌함에 기반을 둔 이벤트 놀이는 강력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만큼 앞으로 인터넷 문화의 하나로 자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