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컬 운동 대부 오재식 박사 별세…“현장이 나를 부른다” 30년 넘게 헌신

입력 2013-01-03 22:04


‘현장’을 사랑했던 에큐메니컬(교회일치·연합) 운동의 대부 오재식 박사가 3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오 박사는 이날 오후 8시 15분쯤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지병으로 하늘나라의 부르심을 받았다. 미망인인 노옥신(80) 여사 등 가족과 교계 및 에큐메니컬 지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편안한 표정으로 임종을 맞았다고 유족들은 전했다. 장례식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총무 김영주 목사)가 주관하는 5일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7일, 장지는 경기도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이다.

1933년 제주에서 출생한 오 박사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나와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한국 YMCA전국연맹 간사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총무,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국제부 간사, 세계교회협의회(WCC) 개발국장 등 에큐메니컬 운동 현장에만 30년 넘게 누볐다. 특히 그는 1960년대 기독교 청년을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 7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80년대 광주민주항쟁과 90년대 평화통일운동 등 한국사회의 역사적 현장을 온몸으로 관통하며 살아왔다.

오 박사는 미국 사회운동 조직의 대가인 S.D.알렌스키를 만나 훈련을 받은 뒤부터 현장 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그는 교파를 초월해 도시빈민과 농민, 산업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민중운동의 조직전문가로, 때로는 국내·외 네트워크를 만들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이끈 핵심 인사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비밀사찰 문건에는 오 박사가 ‘조직의 귀재’라고 적혀 있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가장 어렵고 위험한 일을 부탁했다. 오 박사는 그런 요청을 받고 나서는 “현장이 나를 부른다”고 믿고 뛰어들었다고 지인들은 회고했다.

오 박사는 한국 기독교의 거목들로부터도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중앙고 재학시절 함석헌 선생의 수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기독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대학 시절 강원룡 목사를 만나고부터다. 1957년 결혼할 때에는 한경직 영락교회 목사가 주례를 섰고, 세례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창립을 주도한 김재준 목사로부터 받았다.

회갑이 지난 뒤에도 그에겐 휴식이 없었다. 참여연대 창립대표, 한국월드비전 회장, 대북지원민간단체협의회 초대회장, 아시아교육연구원 원장 등을 맡아 헌신했다. 이같은 공로로 2002년에는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오 박사는 늘 막후에서 활동하며 자신이 외부로 드러나는 걸 꺼려했다. 지난해 11월 중순, 팔순 잔치를 겸해 본인의 회고록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대한기독교서회)’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날 3년여 전부터 피부암과 췌장암, 대장암 등 병마와 싸우느라 거의 반쪽이 되다시피 한 몸으로 등장한 오 박사의 한마디는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내 이름으로 책을 쓰면 내 자신이 교만해질까 두려웠습니다.”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미친 듯’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 돌볼 여유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일이 주어질 때면 “그럼, 해야지”라고 말했고, 가야 할 곳이 있으면 “그럼, 가야지”하고 발걸음을 내디딘 사람이었다고 지인들은 전한다. 그는 회고록에서 “후회없이 살았다”고 고백했다. 사도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이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딤후 4:7∼8)고 말했다. 오 박사도 그의 사명을 다하고 의의 면류관이 예비된 천국으로 떠났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