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44) 물이면서 그림자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시인 신영배
입력 2013-01-03 18:13
물 위에 띄운 삶과 죽음의 사유
산다는건 자기 그림자 위를 걷는 일
충남 태안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난 신영배(41)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성장한 새카맣고 말 없는 소녀였다. 하지만 열네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처음 치른 죽음의 공포와 슬픔은 사춘기 소녀의 폐부에 고여 출렁였다. 고교 졸업 때 국어선생님이 건넨 김수영 시집을 읽으며 문학에 눈뜬 소녀는 스무 살 무렵에 잠깐 직장생활을 하다 24세 늦은 나이에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한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극도로 힘들어해 강의실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누가 알 수 있었겠나. 욕조에 담긴 조용한 물의 이미지 안에 이토록 가혹하고 끔찍한 기억들이 출렁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몸속에 소녀가 들어서는 때가 있다/ 애 들어서듯이 내 몸에 입덧을 치는/ 소녀가 있다 어둠 속에서/ 그런 날은 암내도 없이 내 몸은 향기롭다/ 내 몸에 소녀가 들어서는 날을 어떻게 알고/ 아버지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온다/ 이십 년 전 죽은 젊은 얼굴을 하고/ 소녀를 찾아온다 그러고는 운다/ 소녀는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본다/ 소녀도 운다 말간 몸뚱어리를 물처럼/ 서로의 몸에 끼얹어주는 풍경”(‘욕조’ 부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는 환상을 그린 이 시를 포함, 첫 시집 ‘기억이동장치’(2006)의 수록시편들은 말 그대로 그의 아픈 기억들을 다른 데로 이동시키는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그 장치란 다름 아닌 ‘물과 그림자’로 상징되는 정화의 이미지이다. 물은 아픈 기억들을 불러내는 풍경이면서 그 아픈 기억들을 흐르게도 하고 멈추게도 하고 가라앉게도 하는 치유의 물질이기도 하다. 이때 시인은 욕조 속에 물이 들어차고 빠지는 시간을 통해 죽음에 대한 기억을 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성년이 되어서야 접한 서울이라는 도시는 혼자 숨어 있기에 좋은 공간이었지만, 불안과 강박을 키우는 복잡하고 삭막한 곳이기도 했다. 물과 그림자라는 상관적 이미지를 매개로 한 상상적 모험과 현실의 탈주는 그 지점에서 탄생했다. 시 ‘욕조’엔 죽은 아버지와의 재회, 슬픔의 승화 외에도 육체적인 에로티시즘이 녹아 있다. ‘서로의 알몸에 물을 끼얹어주는 장면’이 그것인데 그의 사랑 이미지엔 늘 아버지의 죽음이 끼어든다. 아버지의 죽음과 실연의 기억들이 현실에 개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겪는 연애의 실패로 인해 그의 그림자는 더 길어진다. 그런 그림자 이미지는 두 번째 시집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2009)에서 좀 더 유연하게 변형된다.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하체가 지하로 빠진 골목은/ 골반에서 화분을 키운다/ 지상에 없는 향기가 흙에 덮여 있다// (중략)// 길가에서 아이들이/ 발끝을 비벼 머리를 지우는 장난을 한다/ 머리를 지운 아이들은 사라진다// 멀리 떨어진 머리를 주우러/ 나는 길어진 내 그림자 위를 걸어간다// 귀가 지하에 잠겨 있을/ 내 그림자의 끝으로”(‘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부분)
그림자 위를 걸어가는 일은 아픈 기억, 결핍 등을 안고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시 속에서 머리를 지운 아이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저는 사라지기 위해, 사라지는 시를 쓰기 위해 그림자 위를 걸어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시의 꿈입니다. 하지만 또, 그것은 아름다운 시의 꿈이기도 합니다. 오후 여섯 시 꽃에 살짝 들어갔다 나오는 환몽이 저에게 시를 향한 힘을 줍니다. 제 그림자 끝 그 머리는 지하에 잠겨 있는 귀처럼 생긴 어떤 아름다운 꽃일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그림자 위를 걸어가는 이유입니다. 시를 쓴다는 건 나의 그림자 맨 끝에 있는 머리를 향해서 가는 과정이며 잡히지 않는 머리를 주우러 가는 행위와 같습니다.”
17년 가까이 서울의 작은 원룸 촌들을 전전하며 살아온 그는 얼마 전 신촌을 떠나 인천 영종도의 한 바다가 보이는 원룸으로 이사했지만 지난해 연말, 어머니가 뇌출혈로 입원하는 바람에 계사년 새해를 병실에서 맞았다. 그의 시가 어머니의 혈관으로 투여되는 링거액보다 더 큰 치유력을 가진 묘약이길…. “세 번째 시집에서는 바다가 조금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