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진원 (4) 戰後엔 ‘청년으로서의 꿈과 도전’ 신앙운동 펼쳐

입력 2013-01-03 18:31


1953년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다. 나는 56년 중앙대 약대에 진학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많아서 의사가 돼 병들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는지 아니면 당시 약대가 인기를 모으고 있어서 그랬는지 아버지는 의대 대신 약대에 진학하라고 권유했다.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 시험을 보러갔는데 경쟁률이 16대 1이었다. 한 수험실에 60명 정도 모여 시험을 봤는데 감독관이 “이 중에 서너 명 붙겠구만”이라고 해서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때는 감리교청년회(MYF, Methodist Youth Fellowship) 한남지방연합회 회장으로 일했다. 연합회는 당시 영등포역 앞에 있던 영등포중앙교회에서 매달 유명인사들을 초청해 청년부흥회를 열었다. 부흥회를 할 때마다 임원들과 함께 풀통을 지고 다니며 직접 벽보를 붙였다. 당시 한남지방은 서울의 한강이남지역을 뜻했는데 강남에서부터 영등포, 김포공항까지 아주 넓어 달리 홍보할 방법이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직접 뛰어다녀야 했는데,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청년들이 많이 와서 우리 부흥회는 유명한 집회가 됐다. 전후의 폐허 가운데 좌절과 절망만 안고 살아가던 청년들은 신앙의 선배들이 전하는 말씀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 이화여대 총장이던 김활란 박사가 단골 강사였는데 강연을 부탁드리러 가면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선뜻 허락했다. 청년들이 강연회장을 가득 채운 데다 기도소리에도 힘이 넘쳐 김 박사도 흡족해했다. 이후 MYF 전국연합회 부회장을 거쳐 회장까지 맡았다. 미국에서 목회하다 지금은 은퇴하신 차연희 목사님이 MYF를 열정적으로 지도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청년운동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60∼70년대 영등포는 경성방직과 방림방적 원풍모방 대한중석 영창악기 같은 큰 공장들이 즐비한 서울의 대표적 공업지대였다.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전국에서 근로자들이 몰려들었다. 잔업에 철야근무로 일은 고됐지만 월급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부치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어쩌다 쉬는 날 여가나 문화생활을 하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학업을 포기하고 생업전선에 뛰어든 젊은 근로자들이 대부분이어서 지식과 교양에 대한 욕구도 높았다. 사회 비판의식도 싹트기 시작했다.

YMCA의 한 간사가 청년근로자들을 위한 교양강좌를 열어보자고 제안했다. 내가 섬기는 영등포제일감리교회는 그때 영등포시장 근처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푸른세대 강좌를 열기로 했다. 상공회의소에 등록된 영등포지역의 기업 120여개를 찾아다니며 강좌안내 벽보를 붙였다.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치솟고 있던 연세대 김형석 교수를 비롯해 유명 대학교수들을 초빙해 강연을 하고 통기타와 노래도 가르쳤는데 대성황이었다. 강좌를 하는 날이면 교통경찰들이 교회 앞에 와서 질서 유지를 해야 할 정도였다. 강연 내용은 주로 ‘청년으로서 꿈과 도전’ 같은 것이었는데, 최근 붐을 이루고 있는 청년들을 위한 토크콘서트와 비슷했다.

강좌를 1년 정도 진행했을 무렵, 경찰서 정보과에서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70∼80년대 노동운동을 선도했던 도시산업선교회와 민주노조운동이 모두 영등포에서 태동했을 정도로 지역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공안당국은 푸른세대 운동에 대해서도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했다. YMCA측과 상의해 강좌를 중단키로 결정했다. 푸른세대 강좌는 이념과 전혀 관계가 없는 지식 교양 프로그램이었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은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