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美 한인들, 참전용사 6명에 ‘報恩 퍼레이드’… 로즈 퍼레이드 ‘꽃차’ 제작

입력 2013-01-02 19:35


매년 1월 1일(현지시간)이면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열리는 대규모 ‘로즈 퍼레이드’가 올해도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를 수놓았다. 행진이라기보다는 축제에 가까운 이 행사에선 기마대와 마칭밴드가 열렬한 박수를 받으며 행진하고, 치열한 경쟁을 거쳐 선발되는 ‘로즈 퀸’은 미 전역의 관심을 받게 된다. 124회째인 이번 퍼레이드의 주인공은 그러나 로즈 퀸이 아닌 6·25전쟁 참전군인들이었다. 이제는 노인이 된 참전군인 6명이 미 국방부가 마련한 꽃차를 타고 100만여명에 이르는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당당히 퍼레이드에 참가한 것이다.

◇더 이상 ‘잊혀진 전쟁’ 아니다=정전 이후 꼭 60년이 되는 해. 꽃차에는 히로시 미야무라와 제임스 페리스 등 한국전쟁 참전용사 6명이 탑승했다. 미야무라는 미국의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까지 받은 용사였지만, 한국전쟁 참전자들에게 쏟아진 이날의 환호는 60년 동안 없었던 것이었다.

감개무량과 회한은 누구에게나 똑같았지만 제임스 매키친의 심정은 남달랐다. 1950년대를 살아간 흑인 병사로서, 귀국 후 환호는커녕 인종차별에 시달린 옛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매키친은 이후 여러 편의 TV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원로배우이자 퇴역군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82세의 노인은 “우리는 개선(凱旋)하진 못했지만 해야 할 일을 했다”며 “이 나라에 봉사했다는 것만큼 영예로운 일은 없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한국전쟁은 해외 파병 미군이 처음으로 인종적 갈등을 겪은 시기이기도 했다고 폭스뉴스는 전한다.

미국 언론들은 이날 퍼레이드를 보도하면서 이제까지 한국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은 물론 베트남전, 이라크전 등에 비해 소홀하게 다뤄 왔다는 점을 부각했다. 3만6000여명의 젊은이들이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도 새삼 재조명되고 있다. 워싱턴타임스 등 여러 언론에서는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었다”고 적었다.

UC리버사이드의 한인사회연구소인 김영옥연구소의 에드워드 황 소장은 “많은 미국인은 한국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퍼레이드에서 퇴역군인을 태운 꽃차는 장미와 카네이션 2만 송이의 꽃으로 꾸며졌다. 길이 16.8m, 높이 6.1m에 이르는 대형 꽃차다. 꽃차엔 워싱턴DC에 있는 한국전쟁참전기념공원에 참전병사들이 한반도를 행군하는 모습을 본뜬 조형물이 실려 눈길을 끌었다. 군인들은 정전 60년 뒤에야 고국이 그들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감격을 누릴 수 있었던 셈이다. 이들에게는 참전공원 부조판에 새겨진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가 바쳐졌다.

◇꽃차 제작에 나선 한인들=이 퍼레이드엔 뒷이야기가 있다. 로즈 퍼레이드에 한국전 용사들이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선 건 다름 아닌 한인들이었다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전했다. 한국전쟁이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으로 남았다지만,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이들에게까지 잊혀진 전쟁일 순 없었다. 팔을 걷어붙인 건 뉴욕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백병(65·여)씨. 40년 전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 온 백씨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전쟁 이야기를 듣고 자란 터였다.

백씨는 지난 성탄절을 맞아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날아와 이곳에 사는 친구들을 모아 장미꽃과 유칼립투스 이파리들을 꽃차에 붙이는 작업을 도맡아 진행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으나 이들은 아버지나 삼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일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이민 온 지 20년을 맞은 메리 한씨는 “참전군인들이 우리가 여기 있을 수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삼촌…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고 했다. 한인사회의 사물놀이 밴드인 ‘파바월드’도 퍼레이드에 나섰다.

이 행사는 최근 미국에서 일고 있는 한국전쟁 재평가 움직임의 결실이다. 미 국방부 산하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사업회’는 “미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참전용사들에게도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행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2013년은 미 상원과 하원이 결의한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해’이기도 하다.

8.8㎞에 걸친 이날 퍼레이드 구간에는 100만여명의 관중이 몰렸고, 미 주요 방송사들은 퍼레이드를 생방송으로 중계했다. 미 전역에서 6000여만명이 이날 행사를 시청한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은 이렇게 새해 벽두부터 기억해야 할 전쟁으로 새롭게 각인되고 있었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