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진원 (3) 6·25 와중 凍死위기서 주님 은혜로 구사일생

입력 2013-01-02 18:32


영등포역 근처에 주둔하는 미군들을 보니 다들 크고 번쩍거리는 반지를 끼고 있었다. 반지 만드는 곳을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미군들이 좋아할 만한 큰 반지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기차역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수입은 꽤 괜찮았는데 반지값 받아내려다 또다시 생사의 고비를 맞았다.

영등포역에서 한 미군에게 반지를 팔았는데 돈을 주지 않았다. 울며 매달리니까 대신 모포를 한 장 주겠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다른 병사들 안 볼 때 주려나보다’ 하고 기다리는데 기차가 출발해버렸다. 어떻게든 모포를 받아내겠다는 마음에 위험한데도 기차에 매달려 따라갔다. 결국 모포는 받았지만 밤늦은 시간 인천항까지 오고 말았다. 서울로 돌아갈 차편은 이미 끊어지고 없었다. 새벽 첫차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창고 처마 밑에 모포를 두르고 앉았다. 추운 겨울밤이라 인적이 거의 없었다. 손발이 시렸지만 하루 종일 장사하느라 피곤했는지 금세 잠이 들고 말았다.

“너 이 자식, 빨리 일어나지 못해.”

잠결에 누군가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발로 몸을 걷어찼다. 깨어 보니 허름한 차림의 아저씨였는데 “너 큰일 난다. 이대로 자면 얼어 죽는다”며 일어나 따라오라고 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갔더니 근처의 교회였다. 교회 문틈으로 새어나오던 따뜻한 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예배당의 온기 속에 그날 밤을 무사히 넘기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나는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겨울 인천항 부둣가에서 가족들도 모르게 얼어 죽었을지 모른다. 전쟁 중에 그렇게 죽어나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운이 좋았다고 치부하기엔 너무 큰 은혜였다. 나를 교회로 인도해준 그 분도, 따뜻하게 재워준 교회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게 아닐까. 먼 훗날 나를 쓰시기 위해 하나님이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내려주셨다고 믿는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했다. 이때 아버지도 구사일생의 위기를 넘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중공군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맞닥뜨린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등을 돌려 뛰었다. 중공군이 총을 겨누며 소리를 질렀다. ‘서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총알이 날아올 수도 있는 급박한 위기의 순간, 다행히도 아버지가 멈춰 섰다. 중공군은 몸수색을 하고 몇 가지 물어보더니 “왜 도망갔느냐. 우리는 아무한테나 총을 쏘는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니다”며 풀어줬다. 중공군이 마구잡이로 총을 쏘았다 해도 놀랍지 않은 시절이었다.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외가가 있는 경기도 시흥으로 피난 갔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쟁이 터진 뒤 담뱃잎을 종이에 만 궐련은 품귀현상을 빚고 있었다. 애연가들은 말린 담뱃잎을 신문지에 싸서 피웠다. 피난 가기 전 남대문시장에 들러 담배를 마는 수제 기구를 하나 샀다. 시흥에 도착해서 작두로 담뱃잎을 썬 뒤 이 기구에 넣고 종이에 말아 팔았는데 불티가 났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들켜 크게 혼이 난 데다 종이까지 떨어져 얼마 못가 중단했다. 중2밖에 안 된 아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신기하기만 하다.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 그런 대담함을 갖게 한 게 아닌가 싶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전쟁은 계속됐다. 서울공업중학교는 훈육소라는 명판을 달고 서울의 여러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학생들이 전쟁 전 입었던 교복에 각각 다른 학교 배지를 달고 모여서 공부를 했다. 군사훈련도 많이 했는데 비상시 학도병으로 투입하려 했던 것 같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