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課題국가’ 진입 멀지 않았다

입력 2013-01-01 18:20


“새 정부는 디테일에 취해 있을 게 아니라 장기계획, 큰 그림을 중시해야 한다”

대선 후 2주다. 해가 바뀐 탓인지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실제로는 고작 보름이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다들 대선을 복기하고 있는 듯하다. 일반 유권자들까지도 새로운 변화를 읽어내려 애쓰는 모양인데 지난 열흘 남짓 새 이런저런 송년회 자리에서 나온 의견들은 귀동냥해보니 대체로 비슷했다.

대선 공약에서 큰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는 지적도 그중 하나다. 또 두 유력 후보의 공약이 서로 매우 유사했다. 복지 확대와 경제민주화 관철이 그것인데, 특히 외신에 소개된 후보들의 공약은 세세하게 보도하지 않은 탓도 크지만 마치 두 후보가 같은 주장을 펴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승패가 갈렸음은 뭘 뜻하나. 한쪽은 공약보다 단일화, 투표율 등에 목을 맸고 다른 한쪽은 시종 디테일(세부정책)을 앞세워 응수했다. 이 때문에 앞으로 대선은 진보와 보수의 다툼이 좌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 선거에 진 쪽은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반면 새 정부는 좀 더 큰 그림에 관심을 쏟아야 하겠다. 대선이 결국 디테일에서 결판이 났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엄청난 변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저출산·고령사회 심화를 필두로 하는 인구구조변화는 제 나름의 시간계획에 따라, 아니 예상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 정부는 국가의 장기플랜 구상에 몰두했었다. 노무현 정부는 2003년 출범하자마자 저출산·고령사회를 우려한 ‘새로마지(새로운 탄생과 삶의 마지막에서 따온 말)플랜 2006∼2010’과 ‘비전 2030’ 등의 중장기계획을 마련해 각각 2005년과 2006년에 발표했다.

하지만 전 정부의 사업을 폄하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는지 두 계획은 2008년 현 정부 출범과 더불어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 2011년부터 ‘새로마지플랜 2’가 이어졌지만 추진 주체는 대통령 직속에서 보건복지부장관 휘하로 격하된 뒤였다. ‘비전 2030’ 역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뒤늦게 현 정부는 지난해 1월 기획재정부에 장기전략국을 설치, 국가 중장기 정책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 성과의 일부가 지난 27일 나온 ‘대한민국 중장기 정책과제’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다시금 째깍째깍 진행되는 인구구조변화 대책이 거론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현 정부가 소홀히 보낸 지난 5년을 생각하면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아닐 수 없다.

나라의 장래가 걸린 중장기계획은 정권이 바뀌거나 지도자가 교체되더라도 지속적으로 관리돼야 한다. 일본에서도 2005년 고이즈미(小泉) 정권 말기에 ‘일본21세기비전’ 보고서가 나왔다. 그렇지만 이후 일본 정국은 해마다 총리가 교체되고 2008년 9월부터는 민주당으로 정권교체 그리고 다시 매년 총리가 갈리는 혼란을 겪으면서 장기계획은 어느 새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일본 민주당도 이 같은 현실을 직시하면서 2011년부터 총리 산하에 국가전략회의를 구축했다. 그 성과는 지난해 7월 ‘국가전략회의 프런티어분과회 보고서’로 집약됐는데 지난달 16일 자민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짐에 따라 프런티어 분과보고서는 다시 뒷전으로 밀릴 처지에 놓였다.

프런티어분과회 보고서는 일본이 저출산·고령사회, 재정 핍박, 경제 정체, 산업구조 경직화, 오염, 기후변화와 재해, 원전 등 동시대의 선진국들이 경험하고 있거나 앞으로 경험하게 될 문제들을 거의 망라하고 있다는 고백에서부터 출발한다. 온갖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는 차원에서 ‘프런티어’란 말을 붙이면서 과제를 잔뜩 짊어지고 있는 ‘과제선진국’의 인식공유를 호소하고 있다.

그 같은 인식은 정파와 계층을 떠나 공유돼야 마땅하다. 새로 집권한 아베·자민당은 당장의 경제 활성화에만 목을 매는 처지라서 한동안 돌아볼 틈도 없을 듯하다.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새 정부가 디테일에 취해있을 게 아니라 장기계획, 큰 그림을 중시해야 할 이유다. 우리도 곧 과제 많은 ‘과제국가’에 진입할 것이니.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