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진원 (2) 아버지, 광복후 조국 미래위해 ‘천안의숙’ 설립
						입력 2013-01-01 17:46  
					
				나를 끔찍이 아끼셨던 할머니는 손자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새벽마다 물을 떠놓고 천지신명에게 빌었다. 별의별 약을 다 써봤지만 차도가 없자 가족들의 시름은 커져갔다. 아버지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눈물로 기도할 뿐이었다.
하루는 교회 사모님이 껍질째 짚으로 엮은 굴을 손주에게 먹여보라고 건넸다. 할머니는 굴을 받아들긴 했지만 날음식인 데다 깨끗한 것 같지도 않아서 먹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 먹던 아이가 굴을 보더니 발을 동동 구르며 먹겠다고 졸라서 할 수 없이 먹였다. 신기하게도 굴을 먹은 다음 내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아들이 그렇게 권해도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던 할머니는 “예수님이 보배 같은 우리 손자를 살리셨다”며 그날부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소천하실 때까지 열심히 교회 다니며 신앙을 지키셨다. 나는 그 후로 굴을 좋아해 즐겨 먹고 있지만 굴 속의 어떤 성분이 작용해서 나의 병을 낫게 했는지 모른다. 굴은 영양의 보고지만 그 속에 약리작용을 하는 특별한 성분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적도 없다. 내가 기적처럼 나은 것은 분명 하나님이 교회 사모님을 통해 치유의 은사를 베푸신 것이다.
아버지는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모두 도망가면서 천안세무서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살림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신앙인으로서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였던 아버지는 부정한 일에 손을 대지 않았다. 박봉 외에는 다른 수입이 없었고, 그마저도 교회와 교육 사업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다. 아버지는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위해 장로 몇 분과 힘을 합쳐 천안의숙을 세웠다. 지금의 계광중학교, 천안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아버지는 집안일보다 천안의숙에 더 매달렸다.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하고 대학생 하숙을 치면서 근근이 생활비를 댔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48년 서울 영등포로 이사왔다. 외삼촌이 영등포에 사셨는데 처남과 동생에게 이사를 권유한 게 아닌가 싶다. 아버지는 세무서에 사직서를 내고 천안의숙은 다른 장로들에게 맡기고 영등포로 올라왔다. 서울에서는 철도국 인사과장으로 10년가량 일하셨는데 힘 있는 자리였는지 명절 때면 사과상자나 계란꾸러미 같은 선물들이 많이 들어왔다. 아버지는 이 선물들을 남김없이 모두 돌려보냈는데, 그때만 해도 철없고 어렸던 나는 아깝고 속상하기만 했다.
아버지의 고지식한 성품 때문에 어머니의 삶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서울에 와서도 삯바느질을 계속 했는데, 규모가 조금 더 커져 조수까지 2∼3명 데리고 포목상에서 주문을 받아 한복을 지었다. 급한 주문이 들어오면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밤을 꼬박 새우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와 여동생, 남매가 대학까지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삯바느질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었는데 용산중학교와 특차였던 서울공업중학교에 붙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공업이 중요해질 것이고 용산에 가려면 강을 건너야 한다며 서울공업중학교 입학을 권하셨다. 내심 용산중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 서울공업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1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다. 충남 홍성으로 피란을 갔다가 서울 수복 이후 집으로 돌아왔다. 전쟁으로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