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강국 싱가포르를 가다] 천덕꾸러기 학교서 ‘아시아의 사자’ 키우는 명품校로
입력 2012-12-31 18:11
‘싱가포르한국국제학교’의 변신
해외 한국학교가 15개국 30개교에 달하지만 학생과 학부모들의 만족도는 대체로 낮다. 영어공부를 강화하거나 좀더 창의적인 교과과정 운영을 바라는 학부모들에게 한국식 교과과정만 고집하는 대부분의 한국학교들은 자녀를 보내고 싶은 곳이 아니다. 현지에서 외국인이 운영하는 국제학교에 자녀를 보내려면 비싼 학비를 감당해야 하는데 학비지원이 이뤄지는 외교관이나 일부 대기업 주재원들이 아니면 힘들다. 한국학교들은 비용은 저렴하다. 하지만 학교 수준이 낮아서 외면받고 있다.
싱가포르한국국제학교(SKIS)가 교민들도 외면하던 천덕꾸러기 학교에서 편·입학 대기자가 줄을 잇는 명품학교로 변신하고 있다.
1993년 설립된 싱가포르한국학교는 이후 18년간 초등과정만 운영했다. 싱가포르한국학교는 한국에서 파견된 교사가 한국 교과과정을 가르치기 때문에 한국의 정규학력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학생과 학부모들의 기대 수준에 못 미친다는 평가가 많아 한때는 졸업하기 전에 전학 가는 학생이 절반에 달했다. 그러나 이제는 우수한 교사진을 갖추고 공인된 국제학교과정을 운영한다는 소문에 학생들이 몰리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국내 대학으로 진학하기를 희망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천덕꾸러기가 명품학교로=싱가포르한국학교는 최근 2년 사이 극적인 변화와 성장을 겪었다. 2011년 3월에 유치원과 중학교 과정을 신설한 데 이어 지난해 3월부터는 고등학교도 문을 열었다. 학생 수는 2010년 99명에서 2012년 356명으로 불어났다. 대기자가 많아 오는 3월 신학기가 시작되면 학생 수가 410명으로 늘어날 예정이다.
싱가포르한국학교 발전의 계기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2008년 7월 국회의원 시절 싱가포르를 방문, 학교 발전과 이전에 필요한 예산지원을 약속하면서 마련됐다.
하지만 싱가포르한국학교는 2010년 하반기까지도 학교운영을 둘러싸고 심한 내홍을 겪었다. 중학교 신설의 필요성이 거론되기는 했지만 한국 교과과정을 고수할지, 국제학교 과정으로 바꿀지를 놓고 내부 갈등이 심했다.
오준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는 “국제학교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한국 교과과정을 버리는 게 옳은지, 어떤 국제학교로 갈 것인지 명확한 컨센서스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때마침 새로 부임한 박정희 교장이 해결사로 나섰다. 2011년 1월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파견된 박 교장은 싱가포르에 도착하자마자 이사회와 학부모, 그리고 대사관 관계자를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박 교장이 내건 해법은 한국 교과과정을 기본으로 하되 미국식 국제학교과정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운영되는 대부분의 국제학교는 유럽식 교과과정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자녀가 한국과 미국의 대학으로 진학하기를 원하는 학부모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걸 파악한 박 교장의 제안에 합의는 쉽게 이뤄졌다. 박 교장이 부임한지 2개월 뒤 한국형 국제학교가 문을 열었다. 중학교와 유치원 과정도 신설됐다.
◇우수한 교사진과 다양한 교과과정=SKIS는 영어와 중국어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언어교육을 강화하는 싱가포르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불가피한 전략이다. 기본적으로 한국교과과정을 준수하면서도 공인된 국제학교과정(캠브리지)을 병행하고 있어서 학습량이 우리나라 정규학교보다 30% 정도 많다.
영어로 이뤄지는 수업이 많은 게 주된 이유다. 수학은 한국어 수업과 영어 수업이 별도로 이뤄진다. 한국에서 파견된 교사가 우리말로 가르치고, 외국인 교사가 싱가포르 수학교재를 가지고 영어로 가르친다. 싱가포르 수학은 미국의 고급수학 교재로 활용될 만큼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사회과목(지리)과 과학과목(생물)도 영어로 이뤄진다. 국어와 국사 등 우리말로 할 수밖에 없는 과목을 제외하면 영어 수업 비중이 높다. 전체 교사 중 원어민 교사 비중이 40%가 넘는다.
원어민 교사들은 미국과 캐나다, 독일, 호주, 싱가포르에서 교사 자격증과 경험을 갖춘 사람들이다. 한국서 파견된 교사들은 대부분 석사 이상 학위 소지자이면서 교과서나 베스트셀러 저서를 집필하는 등 역량이 출중한 인재들이다.
SKIS학생들의 학업성취도도 눈에 띌 만큼 향상됐다. 지난해 10월 미국의 컬리지보드가 주관한 PSAT에 응시한 중3∼고1 18명 중 8명이 140점 이상(240점 만점)을 받았다. 고1에 해당하는 미국 10학년 학생들의 평균 점수가 133점인 걸 감안하면 뛰어난 성적이라는 자평이다.
새해부터 고3이 되는 학생 14명의 SAT 모의고사 성적은 IVY 리그 합격 가능권인 2100점에 육박했다는 게 이 학교 중등부장 이정희 교사의 귀띔이다.
SAT 점수 못지않게 미국 유명대학의 당락을 좌우하는 AP(Advanced Placement, 대학과목선이수) 프로그램이 개설된 것도 이 학교의 특징이다. 지금은 지리, 세계사, 화학 3과목에 그치지만 앞으로 점차 늘려나갈 계획이다.
싱가포르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수학올림피아드에서 이 학교 정서현 학생(중2)이 2위에 올랐고 중국어능력시험을 치른 8명 전원이 합격하기도 했다.
◇“학교가 즐거워요”=세 자녀(고1, 초6, 유치원)를 모두 SKIS에 보낸 손은영(45·여)씨는 “공부도 많이 시키지만 무엇보다 선생님들이 권위적이지 않고 학생들을 따뜻하게 챙겨주는 것 같아 마치 대안학교에 애들을 보낸 것 같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손씨의 세 아이는 아빠의 직장을 따라 두바이에서 서울로, 다시 싱가포르로 학교를 옮겨 다녔는데 그 중 큰 딸 현지(18)가 학교생활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현지는 싱가포르 현지 학교를 다니다가 동생이 먼저 다니는 걸 지켜본 뒤 SKIS로 옮겼다. 현지는 “포기하지 말라며 눈물을 보이시는 선생님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며 “공부가 쉽지는 않지만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선생님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SKIS 학생들은 학기가 끝날 무렵인 지난달 18∼20일 3일간 기부와 봉사를 겸한 걷기행사(FUN RUN)와 춤과 노래, 밴드연주, 발표를 뽐내는 축제(SKIS IDOL)를 즐겼다. 일부 학부모들도 코믹한 분장과 의상으로 학생들에게 뒤지지 않는 재치와 열정을 과시했다.
싱가포르=전석운 기자 swc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