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진원 (1) 두번의 죽음 넘겨 주신 ‘임마누엘 하나님’ 찬양

입력 2012-12-31 20:56


계사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도 기쁨과 희망, 감사와 나눔의 한 해가 되리라 믿는다. 지금 우리는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지만 좌절하거나 낙담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겨레를 사랑하셔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

돌이켜 보면 격동의 시대였다. 나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광복과 6·25 전쟁을 겪고 산업화, 민주화의 거센 물결 한가운데를 지나왔다. 간단치 않은 시대였지만 언제나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로 목이 멜 정도로 감격스런 일이 많았다.

영등포의 작은 골목 안에 개업한 약국은 전국에서 몰려오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영등포구의회 의장과 법무부 갱생보호공단 이사장으로서 공직에 봉사하는 행복도 누렸고, 대한기독교서회 대표이사 사장, CBS기독교방송 후원회장, 기독교타임즈 사장으로 교계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나는 평생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을 갖고 살아왔다.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겪었지만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났다. 이후에도 고비마다 극복하도록 도와주시고 넘치도록 복을 부어주셨다. 아무것도 아닌 내게 이처럼 큰 복을 주신 것은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하고 이웃들과 아낌없이 나누라는 뜻이셨을 것이다.

1937년 내가 태어난 곳은 충남 홍성의 홍성제일감리교회 바로 뒷집이었다. 어머니는 이 교회의 전도사로 봉사하셨다. 새벽 다섯 시에 산통이 와서 홍성제일감리교회 담임을 맡고 계시던 전재풍 목사님의 사모님이 나를 받아주셨다.

어머니 박애라 전도사님은 경기도 시흥이 고향이었다. 외가는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는데. 외국인 선교사가 시흥에 전도하러 왔을 때 제일 먼저 주님을 영접하고 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가정교회를 열었다고 한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외삼촌은 배재학당에 진학했고, 어머니는 인천 영화여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까지 ‘유학’을 갔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을 지낸 고 오경린 감독의 손계옥 사모님과 같은 반에서 수업을 받으셨다고 한다. 신학교를 마친 어머니는 노래 실력이 뛰어나 일본 유학을 추천받았지만 전도사로 파송되는 길을 선택했고, 홍성에서 아버지 정순모 장로님을 만나 결혼했다. 아버지는 충남 청양이 고향이었는데 서른둘에 장로로 피택될 정도로 믿음이 좋은 분이었다. 결혼 당시에는 세무서에서 일했다.

내가 세 살 때 천안으로 이사를 나왔다. 어머니는 천안제일감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다. 어머니 덕분에 교인들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난다. 옛날 교회에서는 의자 없이 방바닥에 앉아 예배를 드렸는데,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이 되면 교인들 앞에 나와 독창을 하곤 했다. 어머니께 야단 맞아가며 노래를 배우던 일, 독창을 하고 나면 교인들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일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천안에서 첫 번째 생사의 고비를 넘었다. 당시로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던 이질에 걸렸는데 병원에서는 현대의술로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며 사실상 ‘사형선고’를 내렸다.

약력 △1937년 충남 홍성 출생 △중앙대 약학대 졸업 △영등포구의회 초대의장 △대한기독교서회 대표이사 사장 △CBS기독교방송 후원회장 △장학법인 남부소년선도재단 이사장 △자녀안심하고학교보내기운동 국민재단 총재 △기독교타임즈 사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 △법무부 한국갱생보호공단 이사장 △한국로타리 총재단 의장 △현 원풍실업 회장 △현 영등포구사회복지협의회 회장 △현 일청합창단 이사장 △현 영등포제일감리교회 원로장로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