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성낙] 가짜 派獨광부 손톱에 낀 석탄가루
입력 2012-12-31 17:08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나선 젊은이들의 도전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2013년은 우리나라가 광부와 간호사를 독일이라는 낯선 외지로 파견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인지 근래 들어 1960년대 열악하던 우리 사회상을 떠올릴 때면 파독 광부·간호사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곤 한다.
반백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낯선 땅에 첫발을 디딘 당시 광부·간호사들이 이젠 백발의 노인이 되어 지난날의 고생스럽던 일들을 초연(超然)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이는 마치 메마른 땅에 내리는 봄비와 같이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그러나 한편 필자의 마음속에 있는 한 학우의 얼굴을 떠올리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그들의 이야기를 너무 쉽게 흘려듣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1960년대 초 독일에서 대학을 다닐 무렵 파독 광부라는 이름으로 독일 땅을 밟은 옛 학우가 멀리 떨어진 광산지역에 왔다는 사연의 편지를 받고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간 적이 있다. 외지에서 옛 학우와의 만남이라 그저 반가워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반백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만난 지 몇 시간이 지나자 차츰 국내 명문대를 졸업한 그 학우가 자신의 신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부로 왔다는 사실, 그리고 함께 온 동료들 중에는 서울의 명문대를 나와 당시 국내 저명한 일간지 현역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광부로 온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즉 그곳에서 만난 이들 중 어느 한 명도 ‘진짜 광부’는 없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필자 기억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만큼 1960년대 국내 사정이 열악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더욱 마음 아픈 기억이 있다. 그 학우는 필자가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손톱에 낀 석탄가루를 보이고 싶지 않아 닦아내려고 며칠 동안 수없이 비누로, 칫솔로 문지르고 또 문질렀지만 미세한 석탄가루를 말끔히 지울 수 없었다며 허탈해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가 보여준 손가락에는 손톱 주변으로 까만 실이 박혀 있는 듯했고, 석탄가루가 문신처럼 박혀 있었으며, 손톱 주위를 얼마나 세게 문질렀는지 핏자국이 보이는 미세한 상처 또한 있었다. 순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가슴에서 일렁거렸다.
오랜 세월이 지나 돌이켜보니 당시 그들은 국내에서는 별다른 미래를 기대할 수 없어 과감하게 파독 광부라는 탈출 기회에 올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불굴의 정신을 증명이라도 하듯 계약 기간이 끝나자 적지 않은 수가 독일 대학에 입학해 전공 학위를 취득했고, 일부는 독일 사회에서 사업가로 변신했으며, 일부는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이는 당시 우리 ‘가짜’ 파독 광부들이 얼마나 우수한 인재들이었는지, 그들이 광부라는 멍에를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에 얼마나 과감하게 도전했는지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파독 광부·간호사 이야기가 나오면 1964년 고(故)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그들과의 만남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대통령 내외를 국빈으로 초청한 서독의 뤼프케 대통령은 박 대통령 내외가 파독 광부·간호사들과 만나는 자리에 동행했다가 실로 감동적인 경험을 했다.
행사가 시작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박 대통령 내외가 자리한 단상은 물론 행사장 전체가 울음바다로 변했다. 뤼프케 대통령과 취재하던 기자들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감동의 순간이 연출된 것이다. 이는 즉시 서독 전역으로 전파되었고, 그 소식을 접하며 눈시울 붉히던 기억이 필자에게는 아직도 큰 감동으로 남아 있다.
손톱에 낀 석탄가루를 며칠 동안 비누로, 칫솔로 씻어내려고 고생하고 고민하던, 우리 시대가 낳은 ‘가짜’ 광부의 얼굴들이 떠오르면서 그들이 남긴 50년의 세월을 다시 돌아본다. 오늘 우리 삶의 많은 뿌리에는 파독 광부·간호사의 뚜렷한 발자취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