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비탄과 미움의 말을 거두고 내일을 말하자
입력 2012-12-31 17:02
마음속 칼을 보습으로 벼리고 창을 낫으로 만들 때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많은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교차하고 있다. 지난 연말 치러진 대선에서 48%의 득표를 하고도 패배한 야권과 지지자들이 힘들어하고 몇 사람은 삶을 버렸지만, 그래도 새해에는 새해의 태양이 있어 많은 이들의 소망을 담은 돋을볕이 양지를 넓혀간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박근혜 당선인이 ‘약속 대통령’이기를 거듭 다짐하면서 국민통합, 정치쇄신, 복지와 경제민주화, 남북관계 개선 등을 실행하겠다고 밝히고 있는 점이다. 이는 야당과 시민사회가 주장해온 의제들과도 상당부분 맥을 같이하는 정책들로 나라를 하나로 만드는 데 더없이 좋은 실천과제들이다. 인수위 일부 인선에서 물의가 빚어지고, 앞으로 이런 식의 비밀 인사라면 문제는 첩첩난관으로 나타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일기도 하지만, 박 당선인의 차분하고 의욕적인 행보에서 과거의 승자들과는 달리 편파의 벽을 넘어줬으면 하는 기대를 갖게 된다.
그 주변 사람들의 행보도 탄솔하다. 선거 승리에 공을 세운 친박(親朴) 인사들, 예컨대 이학재 비서실장,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 안대희 정치쇄신특별위원장, 남기춘 클린정치위원장 같은 이들의 기득권 포기 선언이 선거 직후의 끓어오르기 십상인 정국을 차분한 분위기로 이끌어 인수위가 평온하게 출발하게 해준 점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승자의 탄력적인 행보에 가상(嘉賞)하기 이전에 정치적으로 확인해야 할 것과 선거전에서 복기해야 할 문제가 있다.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것은 경제성장이나 남북관계의 개선, 동북아 외교관계의 안정성 같이 중차대한 문제 이전에 절박한 심정으로 어루만져야 할 것이 국민대통합이라는 사실이다. 선거가 끝난 지 보름이 돼가도 계속 균열과 ‘멘붕’ 현상이 이어질 만큼 이번 대선의 후유증은 광범위하다. 1992년 김대중 후보가 14대 대선에서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할 당시(후에 번복되었음) 겪었던 애석한 감정이 회한 속에 사라지는 김대중이라는 한 퍼스낼리티에게로 향하는 것이었다면, 이번의 후유증은 박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은 48%의 유권자 개개인의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어서 위험하다.
이는 이번 대선이 영·호남과 좌·우의 갈등만이 아니라 오랜만에 다시 등장한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대척, 거기에 2030과 5060의 갈라짐까지 가세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매우 큰 트라우마를 남길 가능성이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이 트라우마가 잘못 치유될 경우 소외감과 분열은 집단적 거부감, 혹은 집단 내상(內傷)으로 내재화할 부작용이 우려된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치유는 대선전의 복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 복기는 새누리당의 승리가 국민대통합을 위한 노력 끝에 얻은 것인지, 진영을 자극한 끝에 얻은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진보진영 후보를 노골적으로 ‘빨갱이’라고 몰아쳤거나, 정치적 입장을 달리한 사람들을 향해 ‘정치적 창녀’ 등으로 선동해 표를 결집시킨 측면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번 대선의 결과가 이런 식으로 양쪽 진영이 총궐기한 끝에 나온 것이라면 앞으로도 이 맹독성의 유혹을 극복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국면이 맘에 들지 않을 때마다 고개를 내밀고 한층 자극적인 언어를 구사하려는 중독 현상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가뜩이나 우리 사회는 정제되지 않은 인터넷 여론이 극성을 부리는 곳이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저질·선동 언어가 일상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우리나라의 정치기상도가 선동과 자극에 따라 형성된다면 앞으로 정치쇄신보다는 선동 전술이 구조화되는 현상을 낳게 될 것이다. 설령 그 총궐기를 부른 것이 좌파의 튀는 언행과 편 가르기식 행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치유의 책임은 집권세력에게 있다.
이런 총궐기 선거의 부작용이 계속된다면, 그래서 지역적으로나 이념적으로 다수가 고착화되고 그런 다수의 승리만이 가능한 구조라면 사회발전은 기대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절대 다수에 약간 못 미치는 ‘소수의 다수’는 마음을 열지 않음으로써 사회 불안정성이 높아질 것이요, 대통령의 정상회담 기록은 어떤 구실로든 공개돼야 한다는 억지주장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게 될 것이다.
국민통합 없이 경제성장 어렵다
이 같은 점을 수긍한다면 이 작은 나라에 서로 갈 수 없는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먼저 여권에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 이를 해소해야 할 것이다. 성서 ‘잠언’에도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18:21)”고 했다. 참으로 정치 지도층들은 혀를 깨물고 요설의 충동을 이겨 정치문화를 건전하게 정착시켜나가야 한다.
이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한국사회가 어떻게 발전해가야 할지를 차가운 가슴으로 점검해야 한다. 점점 먹고살기가 힘들어지고, 젊은이들의 저항이 높아지는 것에 대한 특단의 처방이 요구된다. 이 문제에 제대로 접근하지 않고는 경제성장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우리가 지금까지 축적해온 민주화의 제도적 성과를 중시하면서 부족한 것들을 더욱 보완해나가는 작업도 필요하다. MB정권에서 일부 후진한 민주화는 새 정부의 반면교사가 되어야 마땅하다.
아울러 제1야당의 환골탈태를 주문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통합당은 치열한 자기반성 속에서 다시 서야 한다. 그래야 당의 역동성이 창출된다. 속히 비상대책위원장 선출을 마무리하고 건전한 비판과 대안이 있는 야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승자에 대한 경의와 협조는 민주정당이 가져야 할 기본적 자세다. 그렇게 시작해야 한다. 진 사람들이 사소한 것들에 대해 꼬투리를 잡는 구태는 너무 많이 보아왔고, 그래서 질릴 만큼 질렸다. 새해는 과거와 다르게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패배한 야권에서 먼저. 그리고 국정운영의 막중하고 어려운 책임을 진 여권에서는 더욱 살을 깎는 노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