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 우체국-캄보디아 김현태 선교사] (1) 캄보디아 가는 길

입력 2012-12-31 18:27


“선교 결심하면 사탄이 100가지 방해”… 염려가 현실로

전 국민의 약 95%가 불교도인 캄보디아는 지난 10월 시아누크 전 국왕의 서거로 국상 중입니다. 이에 따라 비교적 차분한 모습으로 연말을 지내는 듯합니다. 또 같은 달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등의 정상이 참가한 ASEAN(동남아시아 국가연합) 행사를 잘 치른 후 캄보디아는 정치, 사회적으로 도약의 날갯짓을 하는 중입니다. 영적으로도 좀 더 도약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우리 부부에게 지금보다는 더 젊은 시절 늘 가슴이 벅차오게 하던 말이 있습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이 말들을 들을 때면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2005년 여름이 끝나가던 무렵 한 선배 의사가 뜬금없이 캄보디아에 선교사로 갈 의향이 없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우리 부부는 현실에 안주하며 선교에 대한 헌신은 추억으로 남겨 가던 무렵이었습니다. 또 캄보디아는 막 복음의 문이 열려 목회자 선교사님들이 많이 들어가던 즈음이라 그냥 흘려들으면서 “기도해 볼게요” 하고 말았습니다.

그 선배 의사는 저에게 의사로서의 의료 중심 사역보다는 의대생들을 중심으로 양육하는 대학생 사역을 제안했습니다. 그해 연말이 돼서야 선교사 파송 제안을 우회적으로 거절한 뒤 한 번도 진심으로 기도해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밀린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아내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도 한번 해 보고 깨끗이 거절하고 당분간 잊고 살자.”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4:35)

나는 아직 선교사로 나갈 때가 아닙니다. 좀 더 한국에서 살면서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도 열심히 섬기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던 저의 얄팍한 꾀를 말씀으로 무너뜨리며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하나님의 뚜렷한 부르심을 보았습니다. 거절할 수 없는 기쁨과 확신이 들었습니다. 곧장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기도에 응답을 받았는데 선교사로 가는 걸로∼, 당신은?” “아직”이라는 대답을 들으며 또다시 쉽게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아 아내에겐 응답이 없는 것을 보니 그냥 내 생각이구나. 하나님이 이 중요한 일을 두 사람에게 다르게 응답하실 일이 없지…’하며 안도했습니다. 하지만 1주일 뒤 아내가 제게 심각한 얼굴로 “하나님이 선교사로 가라 하던데”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때 아내는 사도행전을 보며 개인 성경 묵상을 하였는데 사도행전을 타고 흐르는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며, 선교사로 가야 되겠다는 겁니다. 우리 두 사람에게 모두 한마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2006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주위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조심스럽게 나누었습니다. 당시 제가 근무하던 포항 선린병원의 원장이셨던 이건오 장로님이 “선교사가 선교하러 나가기로 마음먹으면 그 순간 사탄이 선교사로 못 갈 100가지 이유를 던져 준다”며 기도로 잘 무장하기를 권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많은 이유가 우리 가족이 선교사로 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첫 아이인 동규에게는 선천성 심장병이 있었습니다. 성장과정에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한번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소견이었습니다. 언제 수술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교지로 나가기가 쉽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좋은 의료진을 붙여 주셔서 정확한 병명을 알려주고 수술을 하게 해 주셨습니다.

2006년 11월 출국을 계획으로 3개월간의 선교사 훈련을 마치고 준비 하던 중 아내가 셋째를 임신하게 됐습니다. 아내는 앞에 두 명의 아이를 낳을 때에도 입덧으로 고생을 했는데 셋째를 가진 채, 선교지에서 입덧을 하려 하니 우리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입덧이 좀 빨리 좋아지기를 기도하며 2007년 1월로 출국을 연기하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연말 금식수련회의 마지막 날부터 미음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준비하던 중 건강검진을 하다가 위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위암은 아니지만 악성 여부를 판명하기가 어려워 최종적으로 6개월 뒤 재검진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검진을 위해 선교지에서 나오기도 어려워 수술로 검사하기로 하고, 다시 출국을 2월로 미루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출국을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제 아내의 검진 결과 갑상선암 진단이 나왔던 것입니다. 임신 중이라 수술을 받는 것도, 수술 후 바로 선교지로 가서 아이를 출산한다는 것도 큰 부담이었습니다. 또 다시 출국을 미뤄야 하는 상황과 아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정이 우리 가족의 선교사 파송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닌 주위의 많은 분들이 선교사로 나가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마치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한 양치기 소년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결국에는 다시 출국을 미루면서 아내는 수술과 출산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은 가운데 수술도 잘 됐고 셋째 아이도 순산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2007년 10월로 출국 날짜를 다시 잡고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항공권을 사는 등 출국 준비는 순조로웠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한켠에는 ‘이번에는 정말 출국할 수 있을까. 내가 선교사로 나가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부산에서 대구로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이었습니다. 시속 100㎞로 주행하던 중 앞 타이어가 ‘펑’하는 굉음을 내면서 터졌습니다. 일반적인 경우 80㎞이상으로 달리다가 앞 타이어가 펑크가 나면 차가 전복이 되거나 뒤에서 오던 차가 충돌을 하는 등 큰 사고로 이어집니다. 다행히 제 차는 펑크와 동시에 엔진이 갑자기 멈춰 버려 관성의 힘으로 갓길에 차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차를 세우자마자 뒤 따르던 큰 트럭들이 쌩쌩 지나가는데 순간적으로 너무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하나도 두렵거나,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견인차가 와서 제 차와 우리 부부를 번갈아 보더니 “앞 타이어 펑큰데, 차가 멀쩡하네요. 아저씨 운 좋았어요”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지켜주셨지요’라고 하는데 갑자기 ‘아 이제는 진짜 비행기 타고 가겠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제 마음 속에 하나님은 눈동자처럼 우리를 지키시는 분임을 이 사고를 통해 명확히 해 주셨습니다. ‘사명자는 그 사명을 다할 때까지 절대 죽지 않는다’는 말처럼 우리를 선교사로 부르신 하나님이 선교사로 나가는 순간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확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선교사로 부르신 것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도록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2007년 10월 29일 저와 제 아내, 동규, 상규, 그리고 막 100일이 지난 은규가 캄보디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김현태 선교사

·1970년 출생

·인제 의대 졸업- 외과 전문의

·포항 선린병원 외과 과장

·2007년 10월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선린 병원 파송으로 캄보디아 선교사.

·현재 캄보디아CCC 의대담당 간사, 캄보디아 헤브론 선교 병원 외과 진료.

·아내 이선옥(1971년생) 춘해대 간호학과 졸업, 졸업 후 7년간 한국CCC 간사.

·김동규, 김상규, 김은규 세 아들과 함께 캄보 디아 사역 중.

김현태 선교사(CCC 의대 담당 간사·헤브론 선교 병원 외과 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