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강국 싱가포르를 가다] 실력따라 학습과정 달라… 하위권 학생도 공부에 흥미
입력 2012-12-31 18:18
싱가포르는 인구 518만명의 작은 도시국가이다. 면적은 서울(605㎢)보다 조금 큰 685㎢에 불과하다. 식수조차 수입해야 할 만큼 부존자원이 전무한 섬나라다. 그런데 이 작은 나라가 국제경쟁력과 경제자유도, 공무원 청렴지수 등 각종 지표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 있다. 1965년 독립 당시 작고 가난한 나라 싱가포르를 세계 일류 국가로 이끈 요인으로 이 나라의 강력하고 지속적인 교육정책을 빼놓을 수 없다. 싱가포르가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자원이 달리 없는 상황에서 국가생존과 국민통합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싱가포르는 교육강국이다. 스위스의 IMD가 발표하는 대학교육 경쟁력 부문 1위에 오른 것을 비롯해 각종 평가 지표에서 세계 최정상권이다. 싱가포르국립대학은 일본의 도쿄대, 홍콩의 홍콩대에 이어 아시아 3대 대학으로 꼽힌다. 초·중·고생들의 학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제교육성취도평가협회(IEA)가 발표한 수학·과학 학업성취도(TIMMS)에서는 싱가포르가 세계 1, 2위를 기록했다. 최근 들어 과도한 입시부담과 철저한 성적 위주 경쟁의 교육정책이 나라 안팎에서 도마에 올랐지만 객관적인 지표는 세계인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싱가포르에서 살려면 2∼3개 언어는 필수=싱가포르에서 택시를 타면 모든 기사들이 영어를 구사한다. 날씨를 소재로 농담을 던질 만큼 자연스럽고 유창하다. 싱가포르한국국제학교에서 18년간 근무한 기사 마티니(57)는 최종 학력이 중학교 졸업이지만 영어는 물론 중국어, 말레이어, 인도(타밀)어, 한국어 등 5개 언어를 구사한다. 언어교육을 중시한 싱가포르 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공용어는 영어와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등 무려 4개에 달한다. 공용어가 이렇게 많은 건 그만큼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화교가 인구의 4분의 3 이상(77%)을 차지할 만큼 중국계가 주류이지만 말레이계(14%)와 인도계(8%)뿐 아니라 아랍계 종족과 유라시아 계통의 혼혈족들이 혼재한다.
싱가포르 초대 총리를 지낸 리콴유(91)는 소수종족을 우대하고 국가통합을 이끌어내기 위해 다언어정책을 밀어붙였다. 영어는 오랜 영국 지배의 영향으로 종족 간 공통어로 자리 잡고 있었다.
초·중·고 정규학교 과정에서는 반드시 영어와 종족언어를 포함한 2개 언어를 익혀야 한다. 싱가포르 정부는 “영어를 종족언어만큼, 종족언어를 영어만큼 유창하게 구사해야 한다”는 모토를 내세우고 있다. 일반 시민들이 영어를 비롯한 2∼3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니 내국인들 간은 물론이고 외국인이 와도 소통의 불편이 없다. 다언어정책을 통해 국민통합을 이뤘을 뿐 아니라 국제경쟁력도 함께 갖추게 됐다.
◇“수학·과학 공부를 가장 좋아하는 나라”=지난달 11일 IEA가 발표한 TIMMS를 보면 싱가포르 학생들의 학습 흥미는 조사대상국 중 1위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수학 공부를 좋아한다’는 반응을 보인 중학생(2학년)이 32%에 달했다. 반면 한국 학생은 8%에 그쳤다. 한국보다 낮은 나라는 슬로베니아(6%)뿐이었다. ‘과학 공부를 좋아한다’는 학생의 반응도 싱가포르(38%)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면 한국은 11%로 꼴찌였다.
싱가포르는 사실 시험압박과 성적경쟁이 심한 나라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졸업시험(PSLE)을 쳐야 하는데 1차 합격률이 60%에 그친다. 재수를 거쳐 합격하면 중학교에 올라가지만 또 떨어지면 직업학교로 가야 한다. 중학교를 마친 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건 더 경쟁이 치열하다. 중학교는 300여개에 달하지만 고등학교는 20개 남짓에 불과하다. 게다가 초등학교 졸업시험 성적에 따라 배치된 학교의 서열이 낮으면 두 단계 시험을 통과해야 고등학교를 갈 수 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서열이 분명하다. 대학은 3개뿐이다.
게다가 싱가포르는 학교 체벌을 허용하는 등 엄격한 규율을 고집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학생들의 학습흥미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유지되는지 의문이었다.
해답은 아이러니하게도 싱가포르의 경쟁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싱가포르는 학생들의 실력과 수준에 따라 교과과정을 상-중-하 3단계로 운영하고 있었다. 상위 6%의 고교생들은 심화학습을 하고 더러는 대학 수준의 과목을 배운다. 하지만 하위 17% 학생들은 기초 과정에 충실할 뿐이다.
싱가포르국립대학을 졸업하고 현지 공립중학교에서 과학교사로 근무하는 한국인 김연수(28)씨는 “실력이 처지는 학생과 뛰어난 학생이 한 반에서 똑같은 내용의 교과서를 공부하는 것은 학습의 흥미를 떨어뜨릴 수 있다”며 “싱가포르 학생들의 학습흥미가 다른 나라들보다 높게 나타난 건 실력에 따라 난이도가 다른 교과과정을 배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래플스, 싱가포르 국가지도자들을 배출한 최고 명문=학교 간 서열이 분명한 싱가포르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학교는 래플스 고등학교(Raffles Institution)다. 최상위권 학생들이 입학하는 이 학교는 1823년 설립돼 역사가 190년에 이르는 싱가포르 최고의 명문이다. 이 학교의 명성은 쟁쟁한 동문들의 면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리콴유 전 총리를 비롯해 역대 3명의 총리 중 2명이 이 학교 출신이다. 역대 7명의 대통령 중 3명이 래플스 동문이다. 내각의 각료 15명 중 4명이 래플스 졸업생이다.
옛 명성만 뛰어난 게 아니다. 2011년 래플스 고교 졸업생 중 485명이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미국의 하버드와 MIT 등 IVY리그 대학에 입학했다. 세계 톱10 대학에 가장 많은 입학생을 보내는 고교라는 평가도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학교에 ‘아이비리그 머신’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래플스 고교는 영재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학교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공부만 시키는 게 아니라 스포츠와 음악, 미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도록 권장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싱가포르가 2011년 국제수학올림피아드를 우승할 당시 국가대표 5명 중 4명이 래플스 학생이었다. 그런데 같은 해에 치러진 각종 체육대회에서도 이 학교 학생들은 두각을 나타내 골프대항전과 크로스컨트리경기를 비롯해 학교 간 대항전에서 32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싱가포르=전석운 기자 swc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