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용우] 두 국립 역사박물관의 운명
입력 2012-12-30 18:55
프랑스의 전직 대통령 사르코지가 야심차게 기획했던 국립 프랑스역사박물관이 좌초됐다. 지난 26일 프랑스 정부가 그간 이 박물관 건립을 위해 만들어진 모든 조직들의 해산을 명하는 법령을 공표했기 때문이다.
제5공화국 들어 프랑스의 대통령들이 수도 파리의 경관을 바꾸고 프랑스인들의 문화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업적을 남기는 일이 마치 전통처럼 굳어졌다. 그 가운데 새로운 박물관 건립은 역대 대통령들이 선호한 옵션이었다. 미국 뉴욕이 앗아간 현대 미술의 중심지라는 위상을 되찾기 위해 퐁피두 대통령이 세운 퐁피두센터가 그렇고,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때 기획되어 미테랑 대통령 집권기에 문을 연 오르세 미술관이 그렇다. 2006년 센 강변에 건립된 브랑리 박물관의 테이프를 끊은 사람 역시 시라크 대통령이었다. 이제 이 박물관들은 관람객들이 운집하는 세계적인 명소로 자리 잡았다.
대공사이니만큼 역대 대통령들의 프로젝트는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예컨대 시라크의 브랑리 박물관은 프랑스의 옛 식민지에서 수집한 유물들을 전시하면서도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숨기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사르코지의 프랑스역사박물관 기획만큼 여론이 거세게 저항한 경우도 드물다.
프랑스역사박물관의 운명은 애초부터 점쳐졌다. 정치권력이 특정한 역사관을 반영한 국립박물관을 세워 공식적인 역사를 쓰겠다는 의도 자체가 역사가들의 본업을 찬탈하는 행위이자 역사를 권력의 도구로 삼겠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사르코지가 역사가들을 배제하고 군사박물관의 큐레이터에게 프랑스역사박물관의 기획을 맡긴 일은 우연이 아니다. 이 큐레이터가 작성한 박물관 건립 기획안은 영웅 사관과 민족 성공 사관에 입각해 있다. 루이 14세, 나폴레옹, 샤를 드골과 같은 전쟁 영웅을 비롯해 군사 및 정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프랑스 민족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선전하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이런 식의 낡은 영웅 사관과 민족 성공 사관은 역사학계에서 폐기된 지 오래다. 심지어 기획안은 다양한 시각에서 써진 역사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강변하면서 단일한 프랑스 민족의 역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역사가들이 일제히 반기를 들고 나선 일은 당연했다. 프랑스역사박물관 기획은 편파적 시각을 강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이며, 역사학계가 이룩한 성과를 유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박물관이 들어설 예정이었던 파리 국립문서보관소의 직원들은 18개월 동안 점거 농성으로 맞섰다.
지난 8월 문화소통부 장관이 프랑스역사박물관 기획을 포기하겠다고 밝힌 것은 비단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이데올로기적으로 의심스러운” 박물관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역사를 권력의 시녀로 삼으려는 시도에 맞서 얻어낸 프랑스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의 값진 승리다.
프랑스역사박물관 기획의 공식적인 폐기가 발표된 지난 26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문을 연 일은 아이러니컬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설립 의도뿐 아니라 그 안을 관통하는 역사관이 놀라울 정도로 프랑스역사박물관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의도로 시작된 두 나라의 국립역사박물관이 한쪽에서는 시민사회의 반발에 부딪혀 폐기되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서둘러 문을 연 사실을, 이 둘 사이의 엇갈린 운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국립역사박물관은 그저 박물관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대화와 소통을 통해 국민 전체의 역사의식을 만들고 나누는 공간이다. 이런 소중한 공간을 졸속으로 만드는 일은 권력이 역사를 도구로 삼겠다는 의도일 뿐이다. 권력이 역사를 독점하는 일은 전체주의의 특징이다. 하나의 역사관만을 주입해 시민의 비판의식과 민주주의를 억압하겠다는 의도이기 때문이다.
김용우 호모미그란스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