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2부) 5년, 새 정부의 과제] ② 경제민주화의 핵심

입력 2012-12-30 18:49


대기업 ‘中企 틈새시장’ 절대 노터치… 상생의 비밀

독일 경제민주화 현장 르포

‘닥터 듀어’ ‘본 아르데네’를 가다


잘 나가는 기업에는 공통점이 있다. 샐러드를 생산하는 독일 중소 식품회사인 ‘닥터 듀어(Dr. Doerr)’와 세계적 박막(薄膜) 증착 기술을 가진 대기업 ‘본 아르데네(Von Ardenne)’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한 우물을 판 기업들이다. 닥터 듀어는 3대째를 이어 오며 샐러드만을 만들었다. 본 아르데네는 1955년부터 전자빔과 플라즈마 기술을 이용한 유리 코팅 분야만 연구했다. 이들은 한눈 팔지 않았다. 현재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연구개발(R&D)에 주력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신기술 개발을 위해 연구개발비를 아끼지 않았다.

닥터 듀어와 본 아르데네의 성공에 상생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독일 중소기업은 자본력에서 앞선 대기업과 직접 경쟁하지 않고 자신만의 특화된 영역을 찾아냈다. 독일 대기업은 엄청난 투자비용과 높은 기술수준 때문에 중소기업이 진출할 수 없는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의 전문분야를 찾아 최선을 다한 것이다. 이들 기업은 구 동독지역 드레스덴에 위치해 있다. 통일 이후 동독지역의 발전을 상징하는 기업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구 동·서독지역 간 불균형을 깨는 첨병이다.

지난 3일 닥터 듀어와 본 아르데네를 찾았다. 기업 관계자들은 자사의 기술력에 자부심이 넘쳤다.

◇제품 특화로 구 동독지역 1등이 된 닥터 듀어

닥터 듀어는 현대식 설비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공정의 대부분이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기계에 의해 이뤄졌다. 식품 기업인 만큼 공장 내부에 들어갈 때 모자와 장화, 작업복 차림을 한 뒤 멸균시스템을 거쳐야 했다. 흰 작업복을 입은 직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닥터 듀어는 고난의 독일 현대사를 품고 있다. 지금 사장인 크리스티안 듀어의 할아버지가 1933년 회사를 만들었다. 성(姓)을 따 회사 이름이 지어졌다. 동독이 구 소련의 지배 하에 있었던 1947년 닥터 듀어는 정부 소유가 됐다가 동독 정부가 들어선 1949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금이 89%였다. 높은 세금으로 기업들이 줄지어 도산하자 1972년 동독 정부는 다시 닥터 듀어를 비롯한 회사들을 국유화했다. 1990년 통일 이후 크리스티안의 아버지는 회사를 찾을 수 있었다.

샐러드 기업이라고 우습게 볼 회사가 아니다. 직원 77명이고 시장에 내놓는 샐러드 종류는 100여 가지다. 지난해 매출이 1720만 유로(244억원)로 구 동독지역에선 독보적인 1위 샐러드 기업이다. 크리스티안은 “분단과 상관없이 역사적으로 서독지역은 단맛의 샐러드가 인기이고 동독 사람들은 신맛의 샐러드를 좋아한다”면서 “우리 회사는 동독사람들이 좋아하는 샐러드를 특화시켜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역사의 풍파를 겪었지만 샐러드 연구를 잊은 적은 없다. 이 집념이 지금의 닥터 듀어를 낳았다. 크리스티안은 “아버지는 동독 정부에 의해 회사를 빼앗겼을 때도 샐러드를 연구했다”고 말했다.

닥터 듀어에는 5명의 연구개발진이 있다. 매출액의 10% 이상을 제품 개발과 설비 투자에 쓴다. 크리스티안은 “지난해에 연구개발비로만 150만 유로(21억원)를 썼다”면서 “좋은 샐러드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에 돈을 아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뛰어난 기술은 좋은 제품으로 이어진다. 닥터 듀어는 고품질·고가 샐러드 시장의 선두주자다. 다른 회사가 같은 종류의 샐러드 400g을 0.99유로(1400원)에 팔 때 닥터 듀어는 200g을 1.29유로(1830원)에 판매한다. 100g당 2.6배 비싼 가격에 제품을 내놓아도 소비자들의 장바구니에 들어간다.

◇세계 50여개국에 수출하는 최첨단 글로벌 기업, 본 아르데네

독일 본 중소기업연구원이 제시한 독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가르는 기준은 연 매출 5000만 유로(710억원)와 근로자수 500명이다. 이를 초과하면 대기업이고, 그 이하면 중소기업이다.

지난해 매출 2억 유로(2840억원)에 직원 640명인 본 아르데네는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알짜배기 대기업이다.

본 아르데네는 태양광 분야와 건축용 기능성 유리의 증착 분야, 플라스마 현상을 이용한 박막증착 분야에 세계적 기술력을 갖춘 선두기업이다.

쉽게 말해 유리나 금속 위에 얇은 막을 코팅해 전자제품이나 건축용 유리로 활용되는 제품과 그 생산 설비를 만든다. 흔히 벽걸이 TV로 불리는 PDP(Plasma Display Panel)도 플라스마 현상을 이용한 평판 표시장치로 본 아르데네의 주요 상품 중 하나다.

기술 책임자인 요하네스 스트럼펠 박사는 “최근에는 에너지 효율이 뛰어난 기능성 유리에 주력하고 있다”면서 “열소비를 방지하는 얇은 필름을 유리 위에 붙여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환경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본 아르데네는 세계 50개국에 박막증착 제품과 생산설비를 수출한다. 드레스덴에 본사가 있고 미국과 중국·말레이시아에 지사를 설치했다. 한국 기업으로는 삼성코닝과 포스코 등에 수출한다.

최첨단 기술을 추구하다 보니 연구개발비에 매년 큰 돈이 들어간다. 스트럼펠 박사는 “연 매출의 10% 내외가 연구개발비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약 250억원이 연구개발에 쓰인 셈이다.

본 아르데네의 힘은 한 분야에 집중하는 우직함에서 나온다. 이 회사는 작고한 설립자 ‘만드레드 본 아르데네’와 따로 떼어 내 생각할 수 없다. 회사 이름도 설립자의 이름에서 따왔다.

아르데네는 핵과 플라스마 분야에 탁월했던 물리학자였다. 그는 1955년 자신의 이름을 딴 연구소를 세웠고, 이것이 본 아르데네의 모체가 됐다. 설립자의 연구정신을 이어받아 다른 데 한눈 팔지 않았다. 독일 통일 이후 구 동독지역에 자본주의 체제가 세워지면서 날개를 달았다. 스트럼펠 박사는 “여러 분야를 함께 신경 쓰는 기업은 한 가지에 몰두하는 우리를 따라올 수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드레스덴=하윤해 기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