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 난 아이들 ‘흙탕물’ 벌컥벌컥 마셔요”… 세밑 남수단서 보내 온 한비야씨의 편지
입력 2012-12-30 17:48
아얀은 딩카족 유목민의 딸이다. 이제 겨우 12살이지만 딩카족답게 농구선수처럼 키가 크고 몸매가 호리호리하다. 새까맣고 조막만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예쁘지만 웃을 때 보면 아랫니 네 개가 비어있다. 남녀 불문하고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이렇게 생니를 빼는 것이 이들의 전통이다. 아얀을 만난 건 캐틀 캠프에서였다. 캐틀 캠프란 딩카족의 임시 주거 형태로 한동네 사람들이 수백 마리의 소를 공동으로 돌보며 사는 집단 거주지를 말한다.
이른 아침 캠프에 도착했을 때, 아얀은 소 오줌으로 얼굴을 씻고 있었다. 나를 보고는 낯도 안 가리는지 활짝 웃으며 치박(안녕) 하면서 오줌 묻은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내가 그 손을 덥석 잡는 걸 보더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치박, 치박하면서 우르르 몰려들었다.
남수단 인구 천만 명 가운데 15%를 차지하는 딩카족에 소는 부의 상징이자 생활의 중심이다. 그러나 이렇게 수백 마리 소와 뒤섞여 사는 캠프에선 주민들 특히 어린 아이들은 나쁜 위생 상태 때문에 쉽게 목숨을 잃는다. 요즘처럼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기에는 물 부족이 거의 살인적이라 현장조사차 캠프를 찾았다.
한 10시쯤, 청년들과 남자 어른들이 소를 몰고 들판으로 나간 후 우리는 동네 아줌마와 아이들과 얘기를 시작했다. 그 사이 친해진 아얀이 힘없이 누워있는 돌쟁이 동생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먼저 대답한다.
“깨끗한 물을 뜨려면 2시간 정도 걸어가야 해요. 근데 난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해서 물 뜨러 갈 시간이 없어요. 바로 밑 8살짜리 여동생은 아직 어려서 무거운 물통을 이고 그렇게 오래 걸을 수도 없고요.”
그래서 이 캠프 사람들은 근처 샛강에서 더러운 강물이나 웅덩이 물을 그대로 먹는단다. 아얀이 물을 뜬다는 곳을 같이 가 보았다. 방금 소떼가 지나갔는지 웅덩이는 완전히 흙탕물이었고 뭔가 둥둥 떠다녔다. 자세히 보니 잔나뭇가지, 나뭇잎, 모기, 심지어 짐승 똥도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십중팔구 기생충 알이나 수인성 전염병 병원균이 있고 살을 뚫고 나오는 기니아충 애벌레도 있을 것이다.
식수는커녕 발도 담가서는 안 되는 더러운 물인데, 세상에 나를 그곳까지 졸졸 따라온 꼬마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 물을 퍼서 마시고 있질 않은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저 물 한 모금이 아이들을 죽일 수도 있는데…. 이 나라의 높은 유아사망률도 고열을 동반한 설사를 일으키는 저런 물 때문인데…. 잔뜩 찡그리고 있는 내게 아얀이 말한다.
“얼마 전 우리 캠프에서도 아이 2명이 설사를 심하게 하다 죽었어요. 실은 내 동생 마비올도 그저께부터 설사를 해요. 걱정돼서 죽겠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더러운 물을 마시면 안 돼.”
내 강한 어투에 아얀은 그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따지듯 대답한다.
“그럼 어떡해요? 다른 물이 없는데.”
그러면서 “이런 물이라도 실컷 마실 수 있으니 감지덕지죠. 다음 달이면 이 샛강 물도 완전히 말라서 물을 찾아 다시 캠프를 옮겨야 해요. 그땐 정말 소도 사람도 죽을 맛이에요” 하면서 그 더러운 물을 꿀꺽꿀꺽 달게 마셨다.
캠프로 돌아가니 동네 어른 수십 명이 망고나무 그늘 밑에 모여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동네선 뭐가 제일 문제인가요?”
내 물음에 주민들이 돌림 노래하듯 대답한다. “피우(물)요.” “아이들 설사요.” “말라리아요.”
“뭐가 제일 필요한가요?”
이 물음엔 외마디 합창이 돌아왔다.
“펌프요!”
같이 갔던 식수 담당 직원이 거든다.
“이곳의 살인적인 물 부족 해결책은 펌프예요. 아무리 가물어도 펌프 물은 안 마르니까요.”
하루 종일 지치지도 않고 날 따라다니며 어떻게든 관심을 끌려고 나를 툭툭 치고 달아나는 장난꾸러기들, 그러다가 내가 그 손을 꽉 잡으면 죽겠다고 소리 지르면서도 온몸을 흔들며 좋아하는 이 꼬마 녀석들은 펌프만 있으면 허무하게 죽지 않아도 되는 거다. 물론 이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건 남수단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정부가 의지는 있으나 능력이 모자랄 때 국제사회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 세상 누구도 물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열 때문에 힘없이 누워있던 마비올이 제 누나를 보더니 반색하면서 물을 달라고 조른다. 아얀이 얼른 아이를 안으며 웅덩이에서 떠온 물을 먹여주었다. 아, 안돼! 이미 심하게 설사를 하고 있는 아이에게 저렇게 더러운 물을 먹이다니. 이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이 오지에 펌프 한 대를 설치, 관리하고 지속적인 위생교육을 시키는 데 드는 비용은 1000만원. 한 사람이 만 원씩 낸다면 천 명만 힘을 합하면 되는 돈이다. 이 세상 누군가에게 생명수를 줄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우리, 무엇을 더 망설일 것인가.
한비야는
2001년부터 2009년 6월까지 한국월드비전 국제구호팀장으로 활동했으며, 2009년 말 퇴직 후 미국 유학을 떠나 미국 터프츠대 플래처스쿨에서 ‘인도적 지원’ 석사과정을 마쳤다. 2011년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UN CERF) 자문위원으로 위촉됐으며 같은 해 11월, IDHA(International Diploma Humanitarian Assistance) 인도적 지원 고급 교육과정 정식강사 및 한국월드비전 초대 세계시민학교 교장으로 임명됐다. 2012년 10월부터 2013년 2월까지 남수단월드비전 긴급구호 총책임자를 맡게 됐다.
◇해외아동결연후원: 매달 3만원
◇문의: 02-2078-7000 / www.worldvision.or.kr(월드비전 홈페이지 내 ‘밀알의 기적’ 코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