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세상의 역설] LP·손글씨·우체통… 향수에 젖다
입력 2012-12-28 18:34
초스피드시대의 아날로그족들
마우스 클릭 한 번에 작은 기계 안으로 들어오는 한 장의 음반. 스마트폰 화면 위로 엄지손가락만 까딱하면 이어폰을 통해 귓속에 울리는 일렉트로닉 사운드. 하고 싶은 말을 1초면 수십명에게 단체 전달하는 스마트폰 메신저. 빨라도 너무 빠른 초스피드 시대에 조금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과거의 향수와 깊이를 느끼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디지털 세상의 한복판에서 ‘아날로그’를 외친다.
LP판으로 듣는 깊은 울림=경기 파주시 헤이리의 한 카페에는 LP판으로 음악을 들으려는 마니아들이 주말마다 모인다. ‘황인용의 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를 찾는 사람들이다. 입장료 1만원을 내면 LP판으로 듣고 싶은 클래식 음악을 신청해 들을 수 있다. 가끔 주인인 방송인 황인용씨가 나와 곡 설명도 한다. 이 곳은 1930년대 미국 극장용 웨스턴 일렉트릭(western electric) 스피커, 1930년 독일에서 생산된 클랑필름 스피커, 1950년대 독일제 비고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수 있어 클래식 마니아들의 발길을 끌어 모은다. 100여석 자리는 주말이면 꽉 들어찬다. 보유하고 있는 1만5000여장의 LP판 중에 클래식 음악이 90%, 팝과 재즈가 10%를 차지한다.
이 카페를 자주 찾는다는 클래식 음악 마니아 손현웅(37)씨는 28일 “한 주간 MP3로 음악을 듣다가 이 곳에 오면 음악의 울림부터 다르다”며 “전자파일로 만들어진 음악은 LP판이 품고 있는 음악의 깊이를 따라올 수 없다. 감동이 밀려와 피로와 스트레스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정성 담은 캘리그라피=컴퓨터, 스마트폰 중독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 사이에 캘리그라피를 배우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개성과 감성을 담은 손글씨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영화 포스터와 책 표지는 물론 소주 브랜드 디자인까지 진출한, 빼놓을 수 없는 마케팅 전략 도구로도 사용되고 있다.
캘리그라피는 인간의 감성을 터치하기 때문에 소비자는 구매 욕구를 느끼고 제품은 훨씬 고급스럽게 어필한다. 강렬함이나 부드러움 등 어떤 단어가 가진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캘리그라피는 아름다운 한글을 더욱 돋보이게 해 각종 디자인 제품으로도 인기다. 애플의 창업주 스티브 잡스도 대학시절 들었던 캘리그라피 강의가 애플 제품의 폰트와 디자인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캘리그라피는 최근 강의 붐까지 일고 있다. 학원 강좌는 전문가반이 3개월에 60만원대로 꽤 비싸지만 자리가 없어 대기자까지 있다. 인터넷 강의도 개설돼 있다.
취미로 캘리그라피 강의를 듣는다는 수강생 김효은(29·여)씨는 “캘리그라피를 배워서 누군가에게 감동적인 선물도 할 수 있고 바쁜 삶 속에서 마음이 차분하고 깨끗해지는 것 같아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느리게 오는 편지=최근 국내 관광지들엔 ‘느린 우체통’도 속속 들어서고 있다. 클릭 한번이면 세계 어디라도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정성스레 적은 편지를 이 ‘느린 우체통’에 넣고 기다린다. 편지를 느린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면 1년 뒤 적혀있는 주소로 배달해준다. 서울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 인천 영종대교 기념관, 전남 청산도 범바위, 경남 거제시 해양파크 등에 설치돼 관광객들에게 인기다. 최근엔 대학 캠퍼스나 구립 도서관 등에도 생겨 ‘느림의 미학’을 전파중이다. 인천 영종대교 기념관은 2009년 5월부터 현재까지 4만여통의 편지를 배달했다.
지난해 겨울 인천 영종대교 기념관에서 ‘2012년을 맞이하는 나에게 쓰는 편지’를 써 ‘느린 우체통’에 넣었던 민다운(25·여)씨는 지난 주 1년 만에 그 편지를 받았다. 민씨는 “지난해 이맘때쯤 새해를 기대했던 나를 보면서 빠르게 지나쳤던 올 한 해를 천천히 돌아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엔 타임레터 서비스 회사도 등장했다. 회사 주소로 편지를 써서 보내면 최대 3년까지 보관했다가 수신인에게 배달해주는 서비스다.
김태휘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경쟁사회에 살고 있는 디지털 세대들이 느린 아날로그적 삶을 통해 쉼과 휴식을 얻고 디지털과 접목시켜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미나 기자 min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