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몬트리올 ‘크라이스트처치’의 예배

입력 2012-12-28 18:12

연구 겸 자료 수집을 위해 몬트리올에 온 지 2주가 지나가고 있다. 지난 주일과 성탄절은 모두 크라이스트처치(Christ Church)에서 예배 드렸다. 이 교회는 현대식 빌딩과 지하도시가 잘 발달된 몬트리올의 신시가지 한 가운데에 고풍스레 자리한 오랜 전통의 성공회 주교좌 교회이다. 몬트리올 대학의 초청연구원으로 있던 지난 1년 나는 주로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아로새긴 스테인드글라스의 은은함,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맑고 단아하며 신비감을 자아내는 한 성가대의 무반주 연주 등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크라이스트처치의 예배 하면 내게 떠오르는 키워드가 있다. 고요함이다. 예배는 시종일관 고요하다. 기도이든 설교이든 소리가 높아지는 법을 여태껏 본 적이 없다. 성가대의 연주조차도 고요하기만 하다.

고요와 침묵

성가대는 그리 많지 않은 인원이지만 16∼18세기 성가를 주로 반주 없이 소화해 내며 시작부터 끝까지 예배를 이끌어간다. 몸에 힘을 빼고 속으로 소리를 삭이는 발성법으로 노래한다. 몸속에서 절제돼 여리게 나온 화음은 간신히 상승하지만 일단 천장에 닿으면 공명이 돼 예배당 전체로 퍼져나가 천상의 울림이 되어 하강한다. 더불어 예배 중간중간 곁들여진 침묵의 시간이 네 번, 말씀과 찬양으로 평온해진 영혼은 침묵의 시간에 이르러 더 깊은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 서너 살 배기 아이들만 한둘 데리고 부인 없이 혼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젊은 캐나다 아빠들도 눈에 띈다. 우리로서는 낯선 진풍경이다.

크라이스트처치의 예배처럼 고요한 예배를 접한 것은 십 수 년 전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가 처음이었다. 밝고 빠르고 힘찬 예배를 주로 경험해온 내게는 그 당시 떼제의 예배가 커다란 충격이었다. 예배는 짧은 기도문에 곡을 붙인 찬양으로 시작된다. “주여, 주 예수여, 나를 기억해 주소서. 주여, 주 예수여, 주님 나라 임하실 때….”(눅 23, 42) 이런 짧은 기도문을 열두 번씩 반복하여 노래한다. 기도문이 내 영혼의 일부가 되어간다. 일이십 분 떼제의 찬양이 이어진 후 말없이 하는 침묵의 기도로 들어간다. 대학시절 삼각산에도 올라 소리 높여 기도하곤 했던 나이기에 말없이 이어지는 15분가량의 침묵은 긴 시간이었다. 침묵은 익숙하지 않으면 30초도 견디기 힘들다. 하루 세 번 일주일을 예배하고 나니 어느 새 나는 고요한 찬양과 침묵에 친숙하게 되었다. 교회 근처에도 가지 않는 유럽의 젊은이들 수십만 명이 매년 떼제 공동체를 찾아온다고 하니 떼제의 예배가 지닌 영적인 흡인력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떼제에서 만난 사람 중에 불교신자가 있었다. 남자 청년이었는데 떼제에 가보고 싶어 한국에서 단단히 준비하여 와서 머문 지 한 달째라는 것이었다. 떼제의 찬송과 기도에 푹 빠져있던 이름 모를 그 불교신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만난 떼제의 방문자 중 최장 체류자였다. 떼제 공동체에서 오래 전부터 살고 있던 한국인 수도자와의 만남도 인상적이었다. 그 수도자는 떼제의 공동체적 삶에 젊음을 바쳤다기에 나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그는 “계획이랄 게 뭐 있나요. 그냥 살아가는 거죠”라고 대답했다. 그와의 면담 후 나의 아내는 ‘수도자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다니 당신이 공부는 하지만 수도원이 뭔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공부를 안 하고도 아는 걸 보면 문자를 해독하는 능력과 지혜는 서로 거리가 먼 것이 분명하다.

시험을 봐도 필기시험 외에 구술시험이 반드시 있고 무얼 해도 일단 말로써 승부를 판가름하는 것이 서양전통이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크라이스트처치나 떼제 공동체처럼 고요와 침묵을 중시하는 문화적 전통의 뿌리도 적잖이 깊다. 고요와 침묵이 기독교적인 삶의 지평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는 것은 역사를 거슬러 가면 4세기 수도주의 시대가 처음이다. 압바 이사야의 말이다. “말하기보다 잠자코 있는 것을 좋아하라. 침묵이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이라면, 말하는 것은 보물을 흩어버리는 것이다.” 압바 아가톤이라는 자는 아예 3년 동안 입에 조약돌을 넣고 지낸 후에야 침묵에 이를 수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침묵

하지만 내가 이런 내용을 쓴다고 하여 나라는 사람이 그런 존재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막의 원로는 “침묵을 지키고 난 다음에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말이 많아 말한 다음에 후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침묵이 깃든 조용한 예배에 이끌리는 것일까? 어떤 사막 원로의 말이 나의 대답이 될 것도 같다. “그대가 침묵으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한다면 어떤 말에서도 더 이상 유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무수한 말의 홍수 속에서도 아무런 말씀 없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침묵에 이끌리는 것, 그것이 내게 유익하지 않을 리 없다. 2012년과 함께 억견(臆見)의 소리를 뒤로하고 2013년 다가오는 새해에는 침묵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