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배의 말씀으로 푸는 건강] 빈 공간 만들기

입력 2012-12-28 18:10


저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완당의 세한도는 눈으로 보는 그림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그림입니다. 글이나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를 의미하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들먹이지 않아도 화폭 가득한 빈 공간이 그의 청고한 마음의 경지를 가늠케 합니다. 그림에서 형상과 색을 중시한 서양에 비해 동양에선 선과 기운을 중시했습니다. 보이는 현상 세계를 표현한 서양화에 비해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그림에서 구현하고자 한 동양화에는 빈 공간이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붓 터치로 잡아낼 수 없는 세계를 동양화에선 여백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백은 단순히 비워져 있는 공간이 아니라 보이는 형태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표현하는 작품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빈 공간은 노동과 계획과 수고로 분주한 우리네 일상에도 필요합니다.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은 끊임없는 활동과 근심 어린 욕망에서뿐만 아니라 멈추고 휴식하며 뒤돌아보는 여백에서도 솟아납니다. 성취에 대한 압박과 성공에 대한 염려를 그치는 곳, 소유의 크기로 만족하려는 무심한 관성과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허세를 그치는 곳, 나아가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지 않고 살아갈 때 생겨나는 단조로움과 무의미함을 그치는 곳, 그곳에서 우리는 삶의 여백을 만납니다. 현대 생활의 분주한 분위기는 ‘하라, 하라, 좀 더 하라’는 구호로 교회 안에까지 깊숙이 배어 있는 느낌입니다. 값없이 받아 은혜로 누려야 할 영혼의 기쁨까지도 선한 행위와 종교적 열심으로 채우려는 강박에 쫓기지는 않는지 되돌아봅니다.

여백이 없는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머무실 자리는 어디이겠습니까? 성령님의 임재도 빈 공간 속으로 이루어집니다. 불의 혀같이 넘실대는 모습으로도 나타나지만 비둘기같이 화평한 모습으로도 임재하십니다. 제단과 대지를 태우고 지축을 뒤흔드는 강렬한 불덩이로 임하시다가 로뎀나무 아래 세미한 음성으로도 다가오십니다. 대낮에 바울처럼 날선 심령을 격파하시기도 하지만 사면이 고요한 밤에 사무엘처럼 천진한 영혼에 모습을 나타내시기도 합니다. 내 삶을 통제하고 하나님조차 내가 조종하려는 노력을 멈추는 그 공간으로 성령님은 오십니다. ‘현대인의 피로와 휴식’에서 폴 투르니에가 준 조언대로 시간과 활동을 비우는 ‘묵상’과 그 빈자리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리심’으로 채우는 것이야말로 분주하고 소란스런 생활에 맞춤한 처방이 아닐는지요?

빈 공간은 동양화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에도 소중합니다. 끓어 넘치는 스트레스는 우리의 면역체계를 약화시키고 탈진시켜 각종 질병에 취약하게 만듭니다. 애리조나 대학의 후안 카르도스 레만(Juan Cardos Lerman)은 쉼이 없는 과도한 육체적 활동이 신체를 어떻게 손상시키는지 알려줍니다. 불면증, 호르몬 불균형, 피로, 신경과민, 신체기관의 과중한 부담들로 인한 수명 단축이 그것입니다. 만병의 근원이 되는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비만 등도 비우지 못해 생기는 생활습관 병입니다.

‘하라하찌부’는 세계적인 장수촌인 오키나와 노인들이 식탁 앞에서 읊조리는 말이랍니다. 음식을 대해 80%만 배부르면 그만 일어나자는 말이죠. 위장을 비우고 포만감을 비우고 두꺼워진 혈관을 비우고 냉장고를 비우고 TV 앞에 앉아 있고 싶은 맘을 비우고 머릿속 근심을 비워 보십시다. 심지어는 기쁨이 아니라 짐으로 다가오는 헌신의 열매까지도 비워야 할는지 모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빌 4:7) 예수님의 비움에 이르진 못하지만 비우는 만큼 가벼워진 몸으로 우리는 더 무겁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대구 동아신경외과원장·의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