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임향자] 탈북 청소년은 ‘통일의 리트머스 시험지’

입력 2012-12-28 20:42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하늘꿈학교’ 임향자 교장

“통일의 그날은 5년 내 옵니다. 늦어도 10년 안에는 반드시 옵니다.”

임향자(56·여) 하늘꿈학교 교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통일이 머지않았음을 힘주어 말했다. 2003년부터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하늘꿈학교를 운영하는 임 교장은 제자들이 우리 사회와 통일한국 전반에 곧 나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4년간 탈북 청소년에게 한국사를 가르친 교사 강윤희씨 역시 5∼10년 내 통일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북한 전문가의 의견이나 최근 북한에서 온 아이들의 말을 토대로 볼 때 통일은 곧 될 것 같아요. 현재 북한은 교육을 비롯한 많은 부분이 무너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어렵다는 거죠. 아이들이 학교와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이들이 변하는 걸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따라 매일 통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체험하기 때문이죠.”

남북통일이 이미 진행 중이며 5∼10년 내 이뤄진다니. 너무 갑작스럽게 통일의 날이 찾아오는 게 아니냐고 묻자 임 교장은 단호히 아니라고 답했다. 남북통일의 본질은 ‘사람 대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한에 온 탈북민을 돌보며 북한을 알아가는 일 자체가 통일을 위한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임 교장은 현 시대의 20∼30대를 통일을 맞아 사회를 책임질 ‘통일 세대’로 봤다. 하지만 10년 전부터 사재를 털어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를 세우고 113명 졸업생들의 어머니이자 인생의 멘토가 돼 준 그야말로, 이미 통일 준비 시대를 사는 ‘통일 세대’였다.

땅 끝으로 가다

4대에 이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임 교장은 연세대 의생활학과 졸업 후 바로 외환은행에 입사했다. 당시 국책은행이었던 외환은행은 높은 급여와 좋은 복리후생, 안정성으로 대학 졸업생들에겐 ‘꿈의 직장’으로 통했다. 전공이 잘 맞지 않았던 임 교장은 외환은행에 입사, 23세의 나이로 명동지점 외환계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입사한 지 2년 만에 사표를 냈다. 막중한 업무로 인한 부담과 사내 위계질서에 따른 중압감 때문이었다.

“당시 지급인증을 하는 일을 했는데 실수하면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항상 마음을 졸이고 살았습니다. 직장 내 서열이나 인간관계에 익숙지 못해 매일 울기도 했고요. 남들이 선망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행복하진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좀 더 여성이 많고 마음이 편한 직장으로 이직해야겠단 생각을 품게 됐지요.”

1979년부터 서울YWCA 사업부 간사로 일하던 임 교장은 1983년 사내 기도모임에서 한 목사로부터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가 목회자가 돼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의 옆자리에서 기도하던 그 목사는 임 교장에게 “당신은 주의 종이자, 사랑의 종”이라고 예언처럼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임 교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털썩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이제 내가 목회 안 하면 남편도 죽고 우리 집안도 다 망하겠구나!’란 생각이 들어서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 같아 덜컥 겁이 났습니다. 군의관 남편도 창피하다고 난리였죠. 결혼한 지 2년 만에 목사가 되겠다고 해서요. 당시 여자 목사라 하면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떠올렸거든요. 남편도 신앙이 있었지만 부인이 신학공부를 하는 데 있어 관대하진 않았습니다.”

이후 임 교장은 40일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의 일이라면 반드시 응답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금식이 끝났음에도 그는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 대신 반대를 하던 남편이 응답을 받았다.

“남편이 꿈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났는데 ‘우리 집안을 망치려고 한다’며 원망하며 때렸대요. 그런데도 예수님이 인자한 표정을 지으셨다는 거예요. 그 꿈을 꾼 뒤 ‘신학교 가라’고 하더라고요. 남편의 권유 덕에 평안한 마음으로 1988년 감리교신학대학교(감신대)에서 실천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1991년 감신대를 졸업한 그는 한국선교전략연구소(Korea Institute for Mission Strategy·KIMS)에 들어가 해외선교 인력을 동원하고 전략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그가 해외선교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하나님께 도움 되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늦고, 어렵게 신학을 공부한 만큼 남들이 못하고 어려워하는 땅 끝에 복음을 전하리라 결심했다.

선교동원가이자 전략가였던 임 교장은 고 김동식 목사와 함께 중국 소수민족에게 선교사를 보내는 ‘실크로드 선교’ 전략을 수립하고 개척 단계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그는 의외의 변수를 만났다. 탈북민이었다. 1996년 대홍수의 여파로 굶주리던 북한 주민들은 국경을 넘었고 그들 중 대다수는 난민처럼 중국을 떠돌았다.

“땅끝 선교인 실크로드 선교 전략을 짜는데 탈북민이 계속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이들을 중국에 정착토록 인도하고 북한에 국수공장도 세우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북한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죠. 결국 1999년부터 탈북민을 한국으로 보내기로 전략을 바꿨습니다. 북한을 바꾸는 건 현지인인 이들이 해야만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통일

탈북민이 북한 교회 회복의 신호탄이라 믿었던 임 교장은 이들을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데려왔다. 많은 이들이 국경을 넘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목숨을 건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 때문에 꽃제비 30여명을 데리고 탈북을 시도한 김동식 목사는 납북돼 그곳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국내에서도 탈북민 사회정착 지원시설인 하나원이 1999년 설립됐다. 임 교장은 하나원을 도와 교회에서 탈북민이 한국사회를 경험할 수 있도록 1박2일 홈스테이 프로그램을 제공키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하나원을 갓 나온 6명의 탈북 청소년들이 찾아왔다. 기초 학력이 부족하고 체력도 약해 일반 학교에 갈 수 없을 뿐더러 연고도 없어 지낼 곳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임 교장은 주변의 도움으로 천안의 고려신학대학교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6명의 교사를 모집해 2003년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를 세웠다. 국내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1호인 하늘꿈학교의 출발이었다.

‘탈북 청소년의 건강한 사회 정착’을 목표로 야심 차게 시작한 학교지만 시작부터 어려움이 몰려왔다. 말과 문화가 다르고 자존심이 강한 탈북 청소년들은 임 교장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자금 부족도 큰 문제였다. 한국사회 정착을 위해 대학입시를 학교의 최우선순위에 뒀던 임 교장은 대학이 밀집된 서울에 2004년 학교를 하나 더 세웠다. 학생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외부에 학교 사정을 알리지 못했던 그는 모자란 비용 대부분을 사재를 털거나 지인들의 후원금으로 충당했다.

그럼에도 남한의 말과 문화가 생경했던 아이들은 쉽게 거짓말을 했고 지치면 주저 없이 학교를 떠났다. 이들의 미래를 고려해 대학을 보내려 교사가 일대일로 공부를 가르치고, 신앙을 지도해도 마찬가지였다. 교사와 학생 모두 매일의 일상이 충격이었고 갈등이었다.

“연고가 없는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교사와 학생이 함께 사는 그룹홈을 만들었어요. 사회구조가 전혀 달라 신뢰라는 개념이 없는 아이들에게 전인교육을 시도하려는 노력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남한 사회의 화려함을 향유하고 싶은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 엇나가거나 한국을 떠나 영국, 노르웨이 등에 이민을 갈 때 너무 좌절이 됐어요. 환경만 바뀌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하더군요.”

이 때문에 골머리를 썩던 그는 병이 났다. 학교가 세워지고 얼마 안 지나 임 교장은 의사로부터 뇌종양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땐 죽는 줄 알았어요. 정말 죽음의 바닥까지 갔지요. 뭐랄까. 주의 일을 하면서도, 목사이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제가 한심했어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저의 부족함을 받아주시고 지금까지 이 병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셨어요. 제 신앙의 시야가 넓어진 경험이었지요. 요즘도 너무 피곤하면 쓰러지긴 하지만요.”

이러한 어려움에도 그와 교사들은 ‘사람의 통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임 교장과 교사들은 고난이 생길수록 기도로 더 매달렸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졸업생의 91%인 102명이 연세대, 서강대, 성균관대 등 유수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생의 80%인 65명이 대학을 졸업했다.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리트머스 시험지

임 교장은 탈북 청소년들을 ‘통일의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부른다. 이들의 한국 정착 여부에 따라 통일이 앞당겨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탈북자들이 한국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들의 정착 여부에 따라 북한 주민들이 통일 시대 이후 자신들의 미래를 예견해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요즘 탈북민들은 휴대전화로 북한과 중국 접경지대 주민들과 통화해요. 이들이 정착을 잘해야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이 어떤 곳인지를 제대로 알려 줄 수 있습니다.”

하늘꿈학교 학생들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 임 교장은 철저한 ‘꿈 교육’을 실행하고 있다. 바로 신앙교육이다.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 비전을 가질 수 있고, 고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다. 그래서 하늘꿈학교는 진로지도에 앞서 매년 여름엔 수련회를 열고 겨울엔 예수전도단 제자훈련학교(DTS)를 열어 신앙훈련의 기회를 제공한다.

하늘꿈학교는 최근 경사가 겹쳤다. 미국 국무성과 정몽구재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지원금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제목으로 그간의 성과와 어려움을 담은 수기집도 나왔다. 또 학교는 내년 9월엔 경기도 성남에서 새 둥지를 튼다. 선한목자교회가 529㎡(160평) 규모의 땅을 제공해 새 건물에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걱정은 남았다. 2개였던 그룹홈이 11곳으로 확대되고 250여명의 수료생과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지인들의 후원만으론 이들을 돌보기가 점차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건축자금 5억원이 부족한 것은 또 다른 고민거리다.

“고난이 생길 때마다 탕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생각대로 안 따라와도 멀리 떠난 자식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주님의 마음을 항상 명심하려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