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라동철] 新 조선왕조실록

입력 2012-12-28 18:22

조선왕조실록은 국보(제151호)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세계적인 기록물이다.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에 걸친 왕 25명의 재위 기간 중 일어난 일들이 빼곡히 기록돼 있다. 이처럼 500년 가까운 시기의 역사를 세세하게 담아낸 기록물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 분량도 888책으로 방대하다.

왕조실록은 후대에 일부 왜곡된 부분도 있지만 객관성에서도 비교적 후한 평가를 받고 있다.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장치들 덕분이다. 왕의 재임 중 행적이 기록된 각종 사초(史草)들은 실록의 기초 자료가 되는데 상급 관리자는 물론 절대 권력을 쥔 왕도 볼 수 없었다. 실록은 완성되면 왕에게 그 사실만 보고한 뒤 춘추관과 지방 사고(史庫)에 보관했다. 이렇게 전해진 조선왕조실록은 당시의 정세와 시대·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타임 캡슐’이다.

현대에도 성격이 비슷한 기록물이 있다. 경기도 성남에 있는 대통령기록관이 보관·관리하고 있는 대통령기록물이다. 대통령의 행적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은 퇴임 전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된다. 12월 현재 기록관에 보존된 기록물은 868만2092건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록물이 825만5045건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전 대통령기록물을 모두 합친 것(42만7047건)의 19배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기록물 관리 체계를 세웠다. 이어 퇴임 전 엄청난 분량의 자료를 기록관에 넘겼다. 이 중엔 정치적으로 민감한 자료나 국가기밀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게 가능한 건 대통령지정기록물제도의 공이다. 이관 시 대통령이 지정한 기록물은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 의결이나 관할 고등법원장의 영장 발부에 의하지 않고는 일정 기간 공개하지 않도록 한 제도다. 일반 지정 기록물은 15년, 개인의 사생활 관련 기록물은 최대 30년까지 보호된다.

알 권리를 제한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부담 없이 기록물을 넘기도록 해 최대한 많은 자료를 보존하자는 법 취지를 생각하면 불가피하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도 지정기록물은 12년에서 많게는 50년까지 공개 유예하는 등 보호하고 있다.

퇴임이 2개월 앞으로 다가온 이명박 대통령의 기록물도 현재 이관 절차가 진행 중이다. 15개 대통령자문기관을 시작으로 대통령실과 경호처 등에서 생산된 각종 기록물들이 내년 2월 24일까지 순차적으로 대통령기록관으로 넘겨질 예정이다. 대통령실이 최근 공개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생산된 대통령기록물은 54만여 건이다. 이관될 기록물의 양이 전임에 비해 대폭 줄어들 것 같다.

공공의 기록은 그 자체가 한 국가의 역사다. 국가원수이자 행정수반인 대통령에 관한 기록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행적이 고스란히 남겨진다는 걸 인식하고 있다면 재임 중 정책결정이나 행보도 더 신중하고 공정하기 마련이다. 대통령기록물이 법률에 따라 충실하게 이관되고, 보호·관리되는 전통을 확립해야 한다. 제도 시행 초기인 만큼 이 대통령의 역할이 막중하다.

퇴임 6개월 전부터 기록물 이관 절차에 들어가도록 한 규정을 고쳐 임기 초부터 상시 이관 체제로 전환할 필요도 있다. 정권 말기에 정치적 고려에 따라 이관 자료를 누락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대통령기록관의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도 과제다. 조선왕조실록이란 소중한 유산을 넘겨받았듯 우리도 대통령기록물이란 ‘신(新)조선왕조실록’을 후대에 남겨야 하지 않을까.

라동철 사회2부 선임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