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이순신-(26·끝) 한산도] 조국의 미래를 꿈꾸다

입력 2012-12-28 18:22


“나라의 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동량(棟樑) 같은 인물이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사람도 없으니, 장차 사직이 어떻게 될지 몰라 마음이 어지러웠다. 하루 종일 누웠다 앉았다 했다(1595년 7월 1일).” “우리나라 역사(東國史)를 읽어보니 개탄스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1596년 5월 25일).”

전쟁터에 있던 이순신에게 우리나라는 걱정거리가 많은 나라였다. 심지어 우리나라 역사책에서조차 희망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초서본 ‘난중일기’ 1593년 6월 21일에는 “새벽에 진을 한산도(韓山島) 망하응포로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산도의 본래 한문 글자는 閑山島 혹은 閒山島다. 이때의 ‘閑’과 ‘閒’은 모두 ‘한가로울 한’이라는 같은 글자의 다른 형태이다. 이순신도 그날 일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閒산도’로 기록했다. 그런데 유독 그 날은 삼한(三韓)의 ‘한(韓)’, ‘나라 한(韓)’자로 한산도를 표현했다.

이순신은 이날 진을 옮겼고, 며칠 후인 7월에는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영 본진까지 한산도로 옮겼다. 그는 그 후 1597년 2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될 때까지 약 3년 8개월 동안 한산도에서 조선의 바다를 지켰다.

이순신이 한산도로 진을 옮기면서 ‘한(閒)산도’를 ‘한(韓)산도’로 표현한 것은 한산도가 민족과 나라를 구할 최전선이며,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본진을 한산도로 옮길 때 편지에도 분명히 그런 생각을 밝혔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만일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그래서 어제 진을 한산도로 옮겨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입니다.”

이순신에게 ‘한(韓)산도’는 왕조 고려, 조선을 넘어선 곳이었다. 일시적인 특정 왕조가 아니라, 주인으로 영원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곳인 한(韓), 그 자체를 바라본 것이다. 당대의 중화사상에 물든 사람들이 말하는 동국(東國), 해동(海東)과 완전히 다른 관점이다.

그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부른 나라 이름인 한(韓)을 부르며, 부강한 나라, 평화로운 나라, 백성이 인간답게 사는 나라를 꿈꾸었던 것이다. 내년엔 그가 꿈꾼 나라를 함께 만들어 보자.

박종평(역사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