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배준호] 복지제도 손질 신중해야

입력 2012-12-27 18:59


내년 2월에 들어설 박근혜 정부. 벌써부터 복지 확충을 위한 정지작업이 여당 내에서 한창이다. 사실 대통령과 여당이 한마음이 되어 복지 강화에 나서면 정부와 야당도 반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복지 분야에는 한 번 도입하면 폐기하거나 바꾸기가 쉽지 않은 제도가 많다. 주지하듯 약한 복지는 격차 확대와 삶의 질 악화로 이어지고, 센 복지는 국민들의 복지의존증을 키워 경제체질을 약화시킨다.

영국과 스웨덴은 1970년대와 1990년대 초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일부 잘못된 복지정책의 궤도를 수정, 지금은 방식은 다르지만 지속 가능성이 높은 복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공적 복지지출은 영국(GDP의 24.1%, 2009년)과 스웨덴(29.8%) 모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22.1%)보다 높고 최하위권인 우리(9.4%)의 2.5배 이상이다.

우리의 복지 수준은 선진국 중 복지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미국의 1969년, 일본의 1978년 수준이다. 그동안 복지지출을 억제해 빨리 성장한 만큼 국민소득 2만 달러에 걸맞은 수준으로 복지를 강화하는 것은 시대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강화의 수준과 우선순위다. 기존 복지 제도의 손질이 주된 작업인데 섣불리 나서면 훗날의 시행착오가 우려된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핵심 공약인 고교 무상교육과 대학 반값 등록금 정책은 광의의 복지지출로서 장래 성장잠재력 증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생산적인 복지정책이나 우선순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반면 암, 심장질환 등 4대 질환 진료비의 전액 건강보험 보장과 65세 이상 중저소득층 노인 대상의 기초노령연금 조기 2배 인상은 ‘고삐 풀린 복지’로 이어질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우리보다 고령화가 2배 이상 진행된 일본에서는 자민당이 지난 16일의 총선에서 ‘자조 노력과 자기 책임’에 입각한 복지를 공약으로 제시해 복지 강화를 내세운 여타 당에 압승, 3년3개월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호흡이 긴 복지에 왕도가 있다면 이는 근로기의 안정된 취업이다. 일할 능력과 의욕을 지닌 이들이 일터에서 각자의 희망대로 일할 수 있을 때 가장 적은 비용으로 양질의 복지 제도를 구축할 수 있다. 물론 근로기의 고용과 취업 안정도 상당 부분은 정부의 몫이다.

나아가 정부는 취업자 등의 실업, 질병, 상해, 장수, 치매, 사망 등의 위험에 대비한 제도 정비와 재원 조달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각종 위험에 대한 대비의 궁극적 책임은 국민 스스로 지도록 해야 지속 가능한 복지 제도 구축이 가능하다.

머지않아 30년 이상의 은퇴기가 도래하면서 많은 이들이 ‘장수는 재앙’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이들 재앙에 대응할 수 있는 효율적인 복지 제도 구축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상당수 정치가와 전문가들은 복지 문제에 필요 이상으로 감성적 잣대를 들이댄다. “주변의 형제들이 앓고 있는 난치성 희귀질환, 비용이 문제인가. 국가가 나서서 고쳐줘야지 … 연금 없이 살아가는 노인들, 본인 책임인가. 국가가 나서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줘야지.”

재앙 수준의 장수자 증가가 예견되는 우리다. 감성적 잣대나 인류애적 접근도 때론 필요하지만 지나치면 공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자세가 요망된다.

다행히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초’고령사회가 펼쳐지는 것은 30∼40년 후다. 대비가 늦으면 정부가 은퇴자 다수의 생계와 건강을 제대로 책임질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5년, 10년 후로 미룰수록 비용이 커지고 대비 수준도 떨어진다. 출범까지 두 달 남은 박근혜 정부가 호흡이 긴 복지 제도 손질과 구축 작업의 첫 단추를 잘 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배준호 한신대 대학원장 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