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명희] 세종시를 어찌할꼬
입력 2012-12-27 19:00
“당초 취지 살리기 위해선 국회까지 내려보내 한국의 워싱턴DC 만들어야”
꿈은 컸다. 수도권 집중해소와 국가균형발전. 역대 정권마다 구호를 외쳤지만 풀기 힘든 숙제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불을 지폈다. 그는 “신행정수도 공약으로 재미 좀 봤다”고 말은 했지만 선거용만은 아니었을 거다.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며 부산 출마를 고집했던 그였기에 비대해진 수도권 기능을 분산시켜 낙후된 지역경제를 살리겠다는 진심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세종시로 수도를 옮기려던 계획이 위헌결정을 받으면서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방향을 틀었다. 과거에도 시도는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6∼79년 충남 공주군 장기면을 중심으로 임시 행정수도를 계획하고 도시설계까지 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2007년 세종시 원안 추진을 공약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선 맘이 바뀌었다. 행정부처 대신 기업들을 내려보내 첨단과학기술도시로 바꾸려 했지만 2010년 제동을 건 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다. “세종시 문제는 미래의 문제다. 미래로 가려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게 박 당선인의 세종시 수정안 반대연설 요지였다. 그러면서 그는 원칙과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얻었고, 이번 대선에서 충청 표심을 얻는 데도 큰 도움을 받았다.
3명의 대권 주자들은 저마다 이해득실에 따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옥동자’를 낳겠다고 호언했지만 난산 끝에 태어난 지금의 세종시는 천덕꾸러기 신세다. 어제 개청식을 가진 정부세종청사에는 올 연말까지 총리실을 비롯한 6개 부처가 내려가고 2014년까지 대다수인 16개 중앙행정기관과 20개 소속기관이 입주한다.
세종시 선발대 공무원들에겐 ‘명품자족도시’로 키우겠다는 박 당선인의 공약이 공허할 뿐이다. 아파트가 부족해 5500명 중 세종시에 둥지를 튼 직원은 1000명에 불과하다. 2000여명은 20∼30분 떨어진 세종시 인근 충청지역에 주거지를 마련했고, 나머지 2000여명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왕복 4∼5시간씩 셔틀버스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주변에 식당이 없어 청사 구내식당은 2부제로 운영하고 있고, 공사장 인근 함바집이 붐빈다고 한다. 야간 응급실이 없어 공무원들은 밤엔 아프지도 말아야 한다. 허허벌판에 들어선 청사엔 뱀까지 출현해 뱀 퇴치작전을 펴기도 했단다.
세종시에 내려간 공무원들과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세종살이’가 눈물겹다. 공무원이 무슨 죄길래. 오죽했으면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직원들에게 민망한 마음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는 업무방식, ‘세종스타일’을 빨리 찾으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고생하는 직원들이 너무 안쓰럽다. 영화관은 고사하고 이마트나 삼겹살 식당이라도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한 장관의 푸념은 공기처럼 누려온 것들이 세종시에선 당장은 손에 닿지 않는 먼 희망사항임을 느끼게 해준다.
그뿐인가. 일주일에 서너 차례 서울에서 회의가 있는 장차관들은 세종시와 서울을 오가는 불편은 물론 세종시에 머무는 날이 손에 꼽힐 정도다. 예산안과 세법 개정안이 국회 심의 중이어서 해당 기재부 직원들은 짐만 세종시로 내려보내고 서울지방 조달청 사무실을 빌려 쓰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행정부처는 입법기관인 국회와 수시로 협의가 필요한데 그때마다 서울과 세종시를 오갈 수도 없고, 화상회의만으로 될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세종시를 되돌릴 수도 없다. 해법은 국회를 내려보내 미국의 워싱턴DC 같은 명실상부한 행정중심 도시를 만드는 거다. 1억4000만원 세비 외에도 1억4000만원가량의 수당과 지원금을 챙기면서 싸움하느라 제 할일 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에게 정말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어차피 운전기사 딸린 고급승용차에 기름값은 국회가 대주고, 비행기 비즈니스석과 KTX 좌석은 공짜이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뇌물 챙겼다가 감옥 가는 국회의원들도 덜 보게 될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제 할일 하면 ‘행복도시’도 멀리 있지 않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