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박순영] 여성 대통령과 살림꾼

입력 2012-12-27 18:49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선거운동 슬로건은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었다. “빈틈없이 세심하게 준비했습니다.” “미국에도 없었던 여성 대통령,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탄생은 가장 큰 변화이자 쇄신입니다.” “열 자식 안 굶기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민을 꼼꼼하게 보살필 대통령.”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대부분의 언론은 후보의 선거공보에서 붉은색 방점이 찍힌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란 카피를 인용 ‘첫 여성 대통령’이란 타이틀을 붙여 뉴스를 전했다.

스위스 심리학자 폴 투르니에는 저서 ‘여성, 그대의 사명은’이란 책에서 “지금까지 인류 역사는 남성 위주의 객관성이 지배하는 얼어붙은 세계였다. 이 기계화된 사회에 (여성의) 따뜻한 온기와 생기를 넣어줌으로써 이 세상이 인격적인 사회로 치료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의 인격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생명을 중시한 메르켈 총리

그가 평생 의사요 상담자로 일하면서 배운 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며, 남성이 쉽게 눈감아 버리는 문제에 대해서도 여성은 훨씬 용기 있게 직면한다는 사실이었으며, 그것은 남성에 비해 여성이 더 인격적이고 직관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성적 성향을 가진 남성 중심의 객관적 관계에는 지독한 외로움이 있다면서, 사랑이 결핍된 객관적 관계에 감성적 성향을 가진 여성의 인격적 관계를 보완함으로써 고독한 문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서구 문명의 위험은 과학과 기술 문명의 승리, 생산 자동화, 국가의 관료주의적 중앙집권화, 대량 생산되는 여가산업 등 인간을 사물화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마르틴 부버는 ‘나-그것’(I-it), ‘나-당신’(I-thou)이라는 대조적 형식으로 설명한다. ‘나와 너’는 객관적 입장의 관찰자로 모든 대상을 객체로서 사물화하는 과학적 자세를 말한다.

반면 ‘나와 당신’은 관찰하고 분석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심리적 진단을 내리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깊이 아는 인격적 관계를 뜻한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가 태양의 찬가에서 “형님 태양, 누님 달”(frattelle sole, sorella luna)이라고 노래한 것은 물리화학적 본질을 조사하거나 천체 운행을 연구한 결과로 마주한 대상이 아니라 형제로서의 ‘당신’ 곧 하나의 인격으로 대한 것이다. 인격적 관계가 인간관계에만 가능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상에는 과학자뿐 아니라 시인이 있어 행복하다. 음식뿐 아니라 음악이 있어 살맛 난다. 기술의 발달만큼 윤리와 도덕이 있어 평화롭다. 고사성어보다 동화에서 꿈을 만난다. 훈계보다 칭찬에서 변화의 기회를 찾는다. 인간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비로소 하나의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남성이 이룬 ‘사물의 세계’에서 여성이 줄 수 있는 ‘인격의 세계’로 전환해야 할 중요한 이유다.

가정 살리는 어머니 역할 해야

여성의 역할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첫째 되는 일은 ‘살림’ 즉, ‘살려내는 일’이다. 먹여 살리고 입혀 살리고 보듬어 살린다. 죽어가던 남편의 용기가 아내의 부드러운 위로에 다시 살고, 시들어가던 아이들의 희망이 어머니의 따뜻한 격려로 살아난다. 그 손에서 가정이 다시 살고, 건강한 가정들로 인해 사회가 살고 민족이 살게 된다. 그 연약한 듯 보이는 사랑의 손길에 ‘살림’과 ‘죽임’이 달려 있는 것이다.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국내의 원전을 단계적으로 모두 폐쇄하겠다는 독일의 선택은 경제성보다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앙겔라 메르켈 여성 총리의 살림의 리더십에 의한 것이었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증언했다(요일 4:9). 박근혜 당선인은 남성에 의한 ‘죽임’의 문화를 극복할 ‘살림꾼’이어야만 남성에 대비되는 진정한 여성 대통령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순영 장충단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