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신창호] 대한민국 진보의 위기

입력 2012-12-27 18:48


대한민국 온건진보 세력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민주통합당은 올해 치른 두 차례의 중요한 선거에서 모두 패배했다. 4·11 총선과 12·19 대통령 선거에서 지면서 집권은커녕 입법부 다수당도 차지하지 못했다.

두 선거 모두 당초 선거지형은 민주당에 유리했다. 총선에서는 ‘MB(이명박)정부 심판론’이 대세였고, 대선에서도 현 정부의 ‘친기업 정책’에 5년 동안 눌렸던 민심이 “바꿔 보자”는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이기지 못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유권자들은 야당의 태도와 정책적 무리수들을 혐오했다. 총선에서는 새누리당이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가동하며 쇄신 카드를 꺼냈을 때 민주당은 비리 연루 인사들을 주요 당직에 올렸다. 대선에선 무소속 안철수 전 후보가 ‘새 정치’를 주창하자 ‘정치 아마추어’라고 비하하다 ‘아름다운 단일화’를 놓쳤다.

이 사이 새누리당은 우리 정치지형에서 가장 급진적인 통합진보당의 공약까지 받아들였다. 경제민주화니 부자증세니 중소기업·소상공인 대책이니 하는 것들은 어느새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선’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됐다. 보수 정당도 집권을 위해선 자기변신을 마다하지 않았던 셈이다.

생각해 보면 이명박 정부 시절 민주당은 그야말로 ‘반대를 위한 반대’에만 매진했다. 그들이 창출했던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에 4년 동안 동의해 주지 않으면서도 대안은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대외 무역이 최고의 경쟁력인 나라에서 국제경제의 조류와 담을 쌓자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국민들로부터 받기까지 했다. 친기업 기류에 반대하면서도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새로운 정책도 내놓지 못했다.

야당은 지난 두 선거의 구도를 ‘유신독재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 싸움으로 변질시켰다. 미래를 이끌 정치세력과 지도자를 뽑겠다는 국민들을 향해 “우리가 집권하면 이렇게 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저쪽이 집권하면 과거 독재세력의 재현”이라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메시지만 던진 셈이다.

1999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런던에서 만나 ‘제3의 길’ 강령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강령에는 정부 규모와 공공재정 지출 축소,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 공급위주 고용정책,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기 위한 사회복지제도의 변경, 법인세 인하 같은 우파 공약이 들어 있었다. 한 해 전 각각 치러진 총선에서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이런 정책을 내세워 좌파 정권을 탄생시켰다.

노동당은 70년대 퍼주기식 사회복지로 영국을 선진국 최악의 경쟁력을 가진 국가로 전락시켰던 오명을 씻었고, 독일 사민당은 82년 이후 16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두 좌파 정당이 왜 100년 이상 자존심처럼 지켜 왔던 ‘분배의 평등’ 강령을 대거 수정했을까. 더 이상 낡은 교조만으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각성 때문이다. 바뀐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원칙’이 결코 정당의 최종 목적인 정권 창출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반성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꼴통=보수정당’ ‘정통 민주화세력’=온건진보라는 도식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 듯하다. 유권자들은 이제 더 이상 정당의 ‘깃발’을 보고 투표하지 않는다.

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