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 키워드로 본 2012 문학계

입력 2012-12-27 17:53

올 국내 문학계는 침체의 늪에서 허덕였다. 오죽했으면 소설 부문을 두고 ‘사상 최악의 성적’(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이라는 평가가 내려졌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이 게을렀던 건 아니다. 총선 및 대선 정국 속에서 문학의 사회적 상상력을 재점검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졌고 작가들의 정치 참여도 활발했다. 이러한 흐름은 시대적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내년에도 이어져 ‘정치’나 ‘사회적 상상력’에 거리를 두고 있던 문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소설의 부진=황석영, 김주영, 김형수, 은희경, 하일지, 김연수, 백가흠 등이 장편을 펴냈으나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른 작품은 한 작품도 없었다. 다만 정영문의 장편 ‘어떤 작위의 세계’가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대산문학상 등 세 개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누적 상금액 1억1000만원을 기록했다는 게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작황 부진은 ‘지금 이곳’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아낼 소재를 찾지 못했다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소설 쪽에서 대작이 나오지 않는 것은 유감이나 그 유감은 내년, 내후년의 대작으로 이어지는 징검돌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시의 약진=올 시단은 풍요까지는 아니더라도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진은영 시집 ‘훔쳐가는 노래’를 위시해 시의 사회적 상상력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이시영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의 경우 창비 주관 만해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사회적 상상력의 회복 문제가 우리 시대에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경향임을 입증해 보였다. 이런 경향은 제주도 강정마을 공동체 회복운동과 ‘희망버스’ 운동 등 문인들의 직접 행동에서도 확인됐다. 한편으로 기존 창비·문학과지성사·민음사 시선에 문학동네와 문예중앙 시선들이 새로 자리 잡으면서 시단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세계문학전집의 다원화=지난 10월 한국 문학출판의 전통적인 강자 창비가 세계문학전집 시장에 뛰어들면서 세계문학전집의 춘추전국시대를 맞았다. 지금까지 241종 305권을 출간한 민음사 주도의 세계문학전집 시장은 이제 후발주자들과의 경쟁 속에서 더욱 분할될 전망이다. 작품 선정의 차별화를 표방한 문학동네를 비롯, 독일 작가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 같은 걸작들을 다수 포함시킨 을유문화사에 이어 열린책들의 ‘W세계문학전집’은 순수문학만이 아닌 장르문학으로까지 시장을 넓히고 있다. 여기에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나 들녘의 ‘일루저니스트 세계의 작가’ 시리즈가 가세함으로써 이른바 스테디셀러의 승부를 세계문학전집에 걸고 있는 형국이다.

◇문인들의 정치 참여=총선과 대선을 치른 올해는 작가들의 정치 참여가 활발했다. 도종환 시인이 지난 4월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의원이 된 데 이어 문재인 선거캠프에 참여했고 지난 7월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중등 교과서에 실린 그의 시 ‘담쟁이’를 삭제할 것을 권고하는 사건이 벌어져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을 낳기도 했다. 12월 대선에서는 안도현 시인이 문재인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은 데 이어 염무웅 구중서 현기영 신경림 등 진보 성향 문인들이 문재인 멘토단에 참여했다. 또 범야권 대선 공조기구로 발족한 ‘국민연대’에 소설가 황석영, 이외수, 공지영이 합류했다. 반면 유신시대 민주화 투사였던 김지하 시인은 시종일관 여성 대통령론에 입각, 박근혜 후보 지지 의사를 밝혀 큰 관심을 모았다.


◇국제PEN 경주대회=24년 만에 한국에서 주최하는 제78회 국제PEN대회가 지난 9월 경북 경주에서 열렸다. 올해 주제는 ‘Free the Word(언어 표현을 자유롭게 하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 르 클레지오, 월레 소잉카 등과 함께 114개국의 해외 문인 300여명이 참가했다.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와 재일한국인 소설가 유미리, 시인 고은, 소설가 이문열 등이 주요 연사로 나섰으며 탈북작가 29명으로 구성된 망명북한작가PEN센터가 만장일치로 국제PEN 가입 승인을 받았다. 특히 인권 뮤지컬 ‘요덕스토리’ 공연이 세계문인들 앞에서 펼쳐져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부대행사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전, 한국PEN역사관의 자료 전시 등에도 인파들이 몰렸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