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감각의 연금술] (43) 헛스윙 하는 당신을 위한 랩소디… 시인 여태천

입력 2012-12-27 18:03


패자에게 보내는 아낌없는 갈채

누구든 죽고 잊혀지는 게 인생


여태천(41)은 문인야구단 ‘구인회’의 코치이자 왼손 투수이다. 언젠가 시합이 열렸을 때 아내와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을 던지다 어깨가 탈골돼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데 묘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남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왼팔을 사용하다보니 마음대로 되지 않는 어떤 답답함을 느꼈고 동시에 그 낯선 체험이 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왜소함을 일깨워주었다는 것이다.

그건 멋진 일이었다. 시란 일상의 언어가 발견의 언어로 중심 이동을 하는 일일진대, 야구 또한 몸의 중심이동을 통해 스윙을 극대화하는 운동이 아니던가. 2008년, 그에게 김수영문학상을 안긴 시집 ‘스윙’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커피 물을 끓이는 동안에 홈런은 나온다./ 그는 왼발을 크게 내디디며 배트를 휘둘렀다./ 좌익수 키를 훌쩍 넘어가는 마음./ 제기랄, 뭐하자는 거야./ 마음을 읽힌 자들이 이 말을 즐겨 쓴다고/ 이유 없이 생각한다./ 살아남은 자의 고집 같은,// (중략)// 커피는 아주 조금 식었고/ 향이 깊어지는/ 바로 그때/ 도무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 국자를 들고 우아하게 스윙을 한다.”(‘스윙’ 부분)

국자를 들고 스윙을 하는 이 야구 마니아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야구 마니아들은 우산이든 볼펜이든 손에 잡히는 거라면 뭐든지 거머쥔 채 스윙을 한다지만 우리가 삶 속에서 홈런을 칠 확률은 극히 작다. 시인은 “오늘 오후에라도 마음 어디쯤에 불이 나고 구멍이 뚫릴 때”, 국자 속 슬픔을 다 쏟아버릴 양 스윙을 하라고 우리에게 권한다. 스윙 또 스윙∼.

경남 하동과 부산을 오가며 성장한 여태천은 고려대 국문과에 진학해서도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외골수에 가까웠다. 독일 시인 횔덜린(1770∼1843)의 영향도 있었다. 횔덜린은 괴테와 쉴러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73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의 이름으로 된 단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한 채 궁핍하게 살다간 시인이다. 여태천은 횔덜린처럼 이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그 상태가 바로 시인의 자리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승리하는 경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야구에 어떤 심도 있는 철학이 스며져 있는지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야구장에 가면 실제로 지고 있는 팀의 응원석은 7회 정도 되면 조금씩 비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경기는 앞으로도 2, 3회가 더 남아 있어요. 남은 이닝을 채우는 선수들을 보면 왠지 마음이 안타까워요. 그래서 끝까지 남아서 마지막 타자가 아웃될 때까지 지켜봅니다. 그게 예의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고요.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저와 다르지 않은데, 아무도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봐주지 않는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야구에서 모든 선수가 다 잘 할 수는 없어요. 반드시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게임입니다. 즉, 버려지고 사라져야 하는 거죠. 아무도 죽지 않는다면 경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헛스윙 삼진아웃을 당하건, 내야 땅볼로 죽든, 아니면 플라이아웃을 당하든 그 타자는 그 게임에서 버려지는 것입니다. 아웃으로 버려지는 그가 없다면 그 게임은 완성되지 않을 겁니다. 삼진, 내야 땅볼, 외야 플라이로 죽는 선수는 버려지면서, 사라지면서 그 게임을 완성하는 겁니다.” 시집 ‘스윙’ 이후 그는 작지만 사소한 일에 대한 관심이 점점 확장되고 있는 중이다.

“나눠가질 게 없는 우리는/ 최선을 다해 책을 덮기로 합니다./ 오늘은 머잖아 미래로 바뀔 테니/ 뭐, 괜찮습니다.// 우리는 세계인의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우리의 나머지가 일으키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어제를 돌보지 않습니다.// 덮어버린 책 너머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낡은 문자들/ 그늘 속으로 깊어집니다.// 천천히 어제의 문자를 소리 내어 읽어 봅니다./ 정지 화면처럼/ 굳어버린 우리의 혀/ 괜찮습니다./ 그렇다고 숨을 쉬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요.”(‘지구를 이해하기 위한 여섯 번째 독서’ 부분)

미래에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누구는 죽고 누구는 잊혀지고 모든 게 사소해질 것이다. 사소한 사람끼리 만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거 꽤 괜찮은 일이지 않은가.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