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영진 (8) 참된 의사의 도리는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입력 2012-12-27 18:31
진료와 축구 등을 통해 내가 있는 위치에서 전도하는 데 노력해왔지만 아버지는 좀처럼 교회에 나가지 않으셨다. 젊었을 때는 어머니가 교회에서 봉사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지나치게 교회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걸 반대했다. 하지만 점차 달라졌다. 어쩌다 가정예배를 드리지 않는 날이면 오히려 왜 예배를 드리지 않느냐며 물었고, 빳빳한 지폐를 미리 준비해뒀다가 손자 손녀가 교회에 갈 때면 헌금하라고 주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85세 때 병원에서 세례를 받았다. 당시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였던 조영준 목사가 집례했다. 세례를 받은 후 아버지는 나도 잘 외우지 못하는 성경구절을 암송했다. 찬송가도 또렷한 목소리로 불렀다. 나도, 가족도, 조영준 목사도 예상 밖의 상황에 너무 놀랐다.
아버지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고 결국 집으로 모셨다. 그러던 2003년 2월 출근하면서 아버지의 상태를 살폈다. 부정맥이 만져졌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병원에 전화해서 잡힌 수술을 연기하라고 했다. 그때였다. 아버지가 기력을 다해 무슨 말인가를 하셨다.
“선….”
“아버지, 둘째 누나 불러드려요?”
누나 이름이 선희여서 누나를 찾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머니가 듣더니 “선공후사(先公後私)라고 하시는데”라고 알려줬다. 공적인 일이 우선이니 병원에 나가 수술을 하라는 당부였다. 아버지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아들에게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치시려 했다. 망설였다. 불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쉽게 돌아가시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끝내고 나왔을 때 임종 소식을 들었다. 그 후 선공후사는 내 좌우명이 됐다.
내 생각과 판단의 바탕에는 배재학교의 정신도 배어 있다. 배재학교의 교훈은 ‘욕위대자 당위인역’(慾爲大者 堂爲人役)이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는 뜻이다. 성경 마태복음 20장 26절 말씀이다. 이를 당시 교장은 3S로 설명했다. 공부(Study)와 정신(Spirit) 체력(Sports)이었다. 특히 정신은 봉사였다.
배재 정신은 은연 중 내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난다. 1983년 레지던트 1년차 때 당직을 하면서 깜빡 잠이 들었다.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른 병동에 불이 난 모양이었다. 얼른 밖으로 나가봤다. 환자들이 의사와 간호사, 보호자의 부축을 받으며 대피하고 있었다. 문득 14층에 있던 환자가 생각났다. 고등학생으로 사지마비 환자였다. ‘그 친구는 도와줄 사람이 없는데….’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14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 환자만 덩그러니 병실에 있었다. 환자를 들쳐 업고 6층까지 정신없이 내려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힘으로 그렇게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 이후로도 응급환자나 중환자를 우선 생각했다. 아마 응급환자나 중환자를 많이 본 의사 중 한 명에 들 것이다.
요즘도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가장 강조하는 점은 의사의 도리다.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지 않거나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의사로서 점수를 주기 어렵다.
‘선공후사’,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겨라’,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등을 설명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병원을 경영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올바른 정신과 함께 강조하는 또 다른 것은 종교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 거부감이 든다면 다른 종교라도 가지라고 말한다. 이는 환자와 보호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신경외과의 특성상 내 힘으로 치료할 수 없는 환자가 반드시 있다. 의사와 환자, 보호자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더라도 어떤 선을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수술 후 보호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손을 통해 환자를 돌봐주셨을 겁니다. 보호자분도 함께 기도해주셨으면 합니다. 가급적 교회에도 나가시고요.”
정리=전재우 기자 jwje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