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이동훈] 총과 칼은 오십보백보!
입력 2012-12-26 19:13
“중국도 학교에서 난동이 벌어지지만 총이 아닌 다른 흉기를 휘두르므로 대량살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미국 코넷티컷주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직후인 지난 15일 한 미국 하원의원은 CNN에 나와 총기를 규제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이 의원 말마따나 같은 날 중국 초등학교에서는 총기 난사가 아닌 칼부림 난동이 벌어져 어린이 22명과 주민 1명이 다쳤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만큼은 총기 업계의 로비를 끊고 규제에 나서겠다고 벼르고 있다. 중국 당국은 자국의 칼부림 사건을 한동안 은폐하면서까지 관영 신화통신을 동원해 “미국의 유혈사태가 총기 규제를 지체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훈수까지 해댔다. 이에 미국 내 강경파들은 “권력은 총구(銃口)에서 나온다는 말은 마오쩌둥의 말”이라면서 “너희들 집안단속이나 잘 하라”고 발끈했다.
윗물 맑아져야 혼란 해결돼
누가 누구를 비웃고 반박할 일이 아니다.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다. 어쩌면 G2로 일컬어지는 두 나라에서 벌어진 사건은 올 한 해 지구촌의 비극을 연말용으로 총정리한 것 같아 씁쓸하다.
두 사건 장본인들은 세밑 세계 곳곳에 스며든 종말론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았다. 미 초등학교 총격 난사범은 지구 종말에 대비해 총을 수집해 온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중국 허난성 초등학교 칼부림 사건 용의자는 ‘마야 종말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종말론이 판을 치는 건 사회가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사회가 어지러운 건 윗물이 맑지 않기 때문이다. 트위터 팔로어 1000만명을 거느린 중국 작가 무룽쉐춘(慕容雪村)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힘이 약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힌다며 이번 두 사건의 원인을 진단했다. 거기엔 배신과 증오가 배어 있다고도 했다.
지난해 ‘반(反)월가’ 투쟁 때만 해도 99%의 민초들은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올 들어 99%의 결집이 느슨해지자 1%의 탐욕은 본색을 드러냈다. 프랑스의 억만장자 기업가·연예인 등은 부자증세에 놀라 세금이 낮은 곳으로 숨고 있다. 오바마 2기 재무장관 하마평까지 올랐던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은 조세피난처에 수십억 달러를 숨겨놓은 사실이 발각되자 “자본주의는 그런 것”이라며 조롱했다. 월가는 재정절벽 현실화로 부자증세를 우려해 주주들에게 서둘러 특별배당을 실시했다. 중국은 어떤가. 시진핑 체제 출범에 앞서 올해 당·정 중앙부처 과장급 이상 관리 354명이 51조원이나 되는 돈을 가지고 해외로 ‘먹튀’하는 일도 벌어졌다. ‘청렴’이 간판인 원자바오 총리마저 친인척들의 축재 의혹으로 체면을 구겼다.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이비 종교 ‘동방의 번개’에 심취한 중국 농촌지역의 인구가 10%나 된다고 한다. 한 신도는 꿈을 안고 베이징까지 취업하러 갔다가 포기해 이 종교를 믿게 됐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종말론자 검거 선풍이 불고 있지만 오히려 독버섯처럼 번져 수도인 베이징 턱밑까지 위협하고 있다.
정권교체기 한국도 경계해야
중국인들은 올해의 한자로 ‘멍(夢)’을 택했다. 위정자들은 항공모함과 노벨상에 대한 ‘꿈’이 실현됐다고 해석하지만 다수 네티즌들은 ‘꿈’이 사라졌다며 허탈해하고 있다. 한국 교수들이 올해 사자성어로 ‘거세개탁(擧世皆濁·온 세상이 모두 탁하다)’을 택한 것 또한 정권교체기 한국 사회도 예사롭지 않음을 말해준다.
총기를 규제하고 종말론자들을 힘으로 누른다면 당분간 사회는 안전해질 수 있다. 그러나 99%의 박탈감을 해결하지 않는 한 사회는 결코 안전해지지 않는다. 윗물이 맑아져야 하고 그 물은 낮은 곳으로 골고루 흘러야 한다.
이동훈 국제부장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