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영진 (7) 월드컵·아시안컵… 잇따라 찾아온 ‘팀닥터’ 행운

입력 2012-12-26 17:54


“운재! 너한테 달렸어. 한 사람 막을 때마다 기도하면서 막아.”

이운재 골키퍼의 다리를 풀어주며 쉰 목소리지만 힘주어 말했다. 팀 닥터로 해 줄 수 있는 다른 말은 없었다. 이운재 선수는 특유의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2007년 아시안컵 축구대회 3·4위전 경기 때였다. 선수 퇴장 판정에 항의하다 압신 고트비 코치를 제외한 핌 베어벡 감독 등 코칭스태프도 후반 초반 모두 퇴장당해 벤치는 텅 비어 있었다. 고트비 코치와 나는 선수들을 독려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목이 거의 잠긴 상태였다. 남은 건 승부차기.

승부차기도 팽팽했다. 6대 5 상황. 일본의 여섯 번째 선수가 들어섰다. 그가 찬 공은 골문 가운데로 향했다. 이운재는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누가 봐도 골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운재는 공에서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넘어지면서 오른손으로 공을 막아냈다. 우리는 이겼다. 힘든 수련의사 생활은 좋아하던 축구를 잊게 만들었다. 1987년 교수로 임용되고 나서야 취미생활 중 하나였던 축구가 떠올랐고, 의대 축구부 지도교수도 맡았다. 학회 활동을 하면서 신경외과 의사들 사이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대한축구협회는 96년 의무분과위원회를 구성했다. 당시 위원장이 내 소문을 듣고 나를 추천했고, 의무분과 위원으로 축구협회와 인연을 맺게 됐다. 의무위원회가 열리면 참석해 의학적 조언 정도를 하고 돌아왔다. 그저 사회활동 중 하나였던 셈이다.

그러던 2002년 2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4개국 친선대회 팀 닥터로 차출됐다. 의아했다. 알아보니 히딩크 감독이 새로 부임했는데, 팀 닥터도 축구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추천했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두바이에 도착하면서 잊었던 내 꿈이 떠올랐다. ‘팀 닥터가 돼서 이회택 선수를 만난다….’

몸이 바빠졌다. 내 꿈 중 하나가 실현됐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전술훈련에 필요한 표시들을 먼저 운동장에 갖다 놓고, 옆줄 근처까지 나가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한번은 연습 중에 누군가 찬 공이 강하게 내 정면으로 날아왔다. 본능적으로 공을 가슴으로 트래핑한 뒤 발리로 다시 넘겨줬다. 그 모습이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든 모양이었다. 그 일로 히딩크 감독과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국과 한국인의 정신력에 대해서도 많이 설명했다. 경기가 끝나고 돌아오기 전 히딩크 감독에게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선물로 받았다. 2002월드컵 팀 닥터로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했다고 후에 들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병원을 비울 순 없었다.

2004년 아시안컵에도 차출됐다.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자리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옆자리에 앉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본 순간 현기증이 났다. 어릴 적 우상이던 이회택 ‘선수’였다. 축구협회 기술위원장 자격으로 가는 것이었다. 현지에서 이회택 기술위원장과 트랙을 함께 뛰기도 하고, 공을 주고받기도 하고, 등산도 함께 다녔다. 그러면서 내 축구 실력을 인정받았고, 또 친해졌고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축구와의 관계는 교회로도 이어졌다. 정동제일교회가 속한 감리회 중구·용산지방회 축구대회에서 3년 연속 예선 탈락했다는 설명이었다. 한번만 참석하겠다고 대회에 나갔는데 첫 승리를 거뒀다. 송기성 담임목사는 축구팀을 아예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선수 모집 공고가 나갔고, 37명이 지원했다. 자비로 유니폼 50벌을 장만했다. 그러면서 전도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정리=전재우 기자 jwje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