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영진 (6) ‘감마 나이프’ 선진 의료술 배우러 스웨덴으로
입력 2012-12-25 17:36
뒤늦게 시작한 의학 공부는 예상과 달리 힘들었다. 첫 시험에서 한 과목을 빼고 모두 재시험을 봐야했다. 당시에는 학생 중 20%를 유급시켰다. 불안했다.
‘첫 성적이 이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거야? 생물학 석사과정 자리를 비워둔다고 했는데 연대 대학원으로 다시 가버릴까.’
자괴감이랄까, 열등감이랄까 마음이 복잡했다. 학군단 중대장의 추천대로 군 생활을 상대적으로 편한 보직에 배치 받아서 미리 공부를 해둘 걸, 후회스럽기도 했다. 다른 한 편에선 나를 도와줬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첫 시험을 잘 치르지 못했다고 해서 포기한다면 내 꿈은, 그 사람들의 기대는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2학기가 지나가면서 공부가 조금씩 수월해지기 시작했다. 특별한 문제없이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신경외과를 전공하면서 수많은 수술을 해야 했다. 신경외과의 특성상 뇌종양이나 뇌혈관과 관련한 웬만한 수술은 모두 머리를 열어야 했다.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뇌에 대해 많이 알아가고 있지만 종종 수술 예후가 좋지 않았다.
1987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스승이던 고 임언 원장이 머리를 열지 않고 뇌종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인 ‘감마 나이프’가 유럽에 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귀가 번쩍 뜨였다. ‘감마 나이프’는 스웨덴에서 시작된 수술 방법이다. 방사선으로 칼의 효과를 내 머리를 열지 않고도 수술에 준하는 치료를 가능하게 한다. 51년 렉셀 교수가 제안했고, 67년 치료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식 뇌질환 치료 장비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현재 청신경종양 뇌수막종 등의 뇌종양과 뇌혈관 기형, 파킨슨씨병과 같은 뇌기능적 질환 치료에 이용된다. 그런데 이 수술이 단순하지 않았다. 보통 수술을 하면 수술 직후 그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감마 나이프는 자연 효과를 내는 치료법이라 결과가 6개월에서 3년 후에야 나왔다. 단순히 기계를 돌리는 기술만으로 환자를 볼 순 없었다.
렉셀 교수의 수제자인 링퀴스트 교수와 접촉했다. 링퀴스트 교수는 임상 결과를 알려주지 않았다. 장기 연수를 요청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가 참석하는 학회마다 쫓아 다녔다. 번번이 거절했다. 실망하지 않았다. 우리 환자에게 좀더 좋은 시술을 해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하나님, 우리나라 환자들도 좀더 좋은 환경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시고, 그 일에 저를 사용하십시오.”
결국 2년 만에 연수 승인을 받아냈다. 곧바로 스웨덴 카롤린스카 대학병원으로 달려가 링퀴스트 교수를 만났다.
링퀴스트 교수는 자리를 만들어줬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스웨덴 의사들은 윗사람과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한참 아랫사람이 과장을 툭툭 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노벨의학상을 심사하는 어떤 과장은 직접 커피를 타고 설거지도 했다. 보다 못해 하루는 과장의 컵을 씻어서 갖다 줬다. 아부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내 생각을 말했다. “한국 문화는 윗사람을 섬깁니다. 이렇게 한번 해보십시오. 기강이 잡힐 겁니다. 이게 ‘휴먼 릴레이션십’입니다.”
3개월이 지나면서 링퀴스트 교수는 내게 신뢰감이 생겼는지 연수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자기 환자도 맡겼다. 봉급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대신 임상일지를 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링퀴스트 교수는 내게 방 열쇠를 건넸다.
67년부터 축적된 자료가 그 방 안에 있었다. 감마 나이프의 모든 것이었다. 링퀴스트 교수는 그 자료를 활용, 논문을 쓰도록 지원해줬다. 뇌혈관질환과 뇌종양에 대한 첨단 시술법도 배웠고, 세계적인 학회에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정리=전재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