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통화전쟁] 美·유럽·日 돈 찍어내기 경쟁… 한국 ‘유동성의 덫’에 걸리나
입력 2012-12-24 19:16
‘글로벌 통화전쟁’이 본격 시작됐다. 미국과 유럽, 일본이 ‘돈 찍어내기’ 경쟁을 벌이면서 유동성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선진국들이 수출보다 당장 양적완화를 통해 내수 경기를 끌어올리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 여파로 해외 수요가 부진한 탓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신흥국들은 통화 가치가 올라 수출전선에 비상이 걸렸다. 늘어난 유동성이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경우 원자재 수입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연쇄적인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일본 중앙은행은 지난 20일 끝난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국채나 회사채 매입에 사용하는 자산매입기금을 지난 10월보다 10조엔 늘린 101조엔으로 확정했다. 최근 총선에서 정권 교체에 성공한 일본 자민당은 물가목표를 2%로 상향 조정하는 등 물가를 희생해서라도 돈을 풀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앞서 미국도 지난 12일 월 450억 달러 규모의 장기국채 매입계획을 발표하면서 양적완화를 이어가기로 했고, 유럽중앙은행 역시 무제한 국채매입을 공언한 상황이다.
선진국들의 무제한 양적완화 정책으로 전 세계 유동성은 폭증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미국의 양적완화 등 영향으로 글로벌 유동성이 2000년 2조6000억 달러에서 지난 8월 13조7000억 달러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이처럼 선진국들이 찍어낸 유동성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신흥국으로 몰리고 있다. 이명활 한국금융연구원 거시국제금융실장은 “미국은 연금펀드와 같은 투자자금이 자국에서 수익률을 맞추기 쉽지 않자 대거 신흥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면서 “그중 펀더멘털이 안정돼 있고 국가신용등급이 높은 우리나라로 유입이 가속화될 경우 원화가치가 추가 절상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문제는 우리나라로 유입된 자금이 장기적인 해외 직접투자보다 주로 증권투자와 같은 단기자금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변동성이 심해 국내 금융시장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단기자금은 선진국들의 경기 변화에 따라 한꺼번에 빠져나갈 가능성도 높다. 국제금융센터는 지난 21일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위기관리대책회의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외국인 주식과 채권자금이 올해 21조8000억원 순유입됐다”면서 “주식자금은 8∼9월과 12월 중 전체 순매수의 3분의 2가 유입됐고 채권도 8월 이후 4개월 연속 순매수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동성 확대로 금융시장 불안이 계속되면 우리 기업의 운신의 폭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시장 흐름이 이어지면서 내년 계획 수립에 차질이 빚어져 ‘기업리스크’가 커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원·달러 환율과 원·엔 환율이 현재와 같은 추세로 계속 하락하면 수출기업의 피해는 계속 불어날 수밖에 없다.
글로벌 유동성이 늘어나면서 달러화로 표시되는 국제 원자재 가격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 10월 기준 옥수수 투기 수요가 전년 동월 대비 58.3% 급증하고 금 투기 수요도 84.3% 늘었다”고 분석했다.
올해 경기침체 영향으로 안정된 흐름을 보였던 국제 유가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중동의 이란 핵문제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발생하거나 경기가 회복 기미를 보이면 가격이 급등할 가능성도 높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유동성이 과도하게 풀렸다는 것은 경기가 좋아질 경우 언제든지 일부 원자재로 쏠림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라며 “그 자체가 불안 요인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