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영진 (5) 야외 기동훈련 나갔다 사고… 제대도 못할 뻔

입력 2012-12-24 18:01


남자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놀이 중 하나는 ‘축구’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특히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아시아의 표범’ 이회택 ‘선수’는 우상이었다. 초·중·고교 때 늘 축구를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단과대학 동기들끼리 축구부를 만들어 경기를 하곤 했다. 미팅을 나가기 위해 위아래로 ‘쭉’ 빼입고 구두를 ‘반짝반짝’하게 닦고 나갔더라도 시합이 있다면 쫓아가서 뛴 후에 땀범벅으로 미팅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

당시 기업은행 농구팀은 체력 단련 상대로 종종 우리 단과대 축구부를 불러 경기를 갖곤 했다. 훗날 큰 매형이 된 김무현 코치가 주선했다. 아마 나를 설득해서 누나를 한번이라도 더 보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김무현 선수는 한국 농구 전성기의 한축을 담당했다. 기업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1964년 도쿄와 68년 멕시코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였다. 선수 은퇴 뒤에는 지도자로 78년 세계선수권대회와 방콕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했다. 78년 아시안게임에선 은메달을 차지하는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김무현 코치에게 농담처럼 푸념했다.

“형님, 이회택 선수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내 우상이잖아요.”

“하하, 이제 와서 네가 선수가 될 순 없고. 의대를 다녔으면 팀 닥터라도 할 수 있잖아? 같이 지내다시피 할 텐데 아쉽다.”

뒷머리를 한대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뜩이나 대학에 들어와 캠퍼스에서 우연히 만났던 초등학교 동창 때문에 마음에 불편함이 앙금처럼 남아 있을 때였다. 나보다 공부를 조금 못했다고 여겼는데 의대생이 돼 있었다.

막연한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 꿈을 접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쉽사리 진로를 결정하진 못했다. 편입할 수 있는 의과대학은 많지 않았다. 입대를 앞둔 상황도 걸림돌이었다. 일단 대학원 생물학 석사과정에 지원해 합격했다. 거의 포기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의대를 다니고 있는 동창생이 부러웠다. 순진한 생각이긴 하지만 어린 시절의 우상인 이회택 선수를 만날 수 있다는 꿈도 이루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의 배려에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열심히 공부했고 경희대 의대에 편입할 수 있었다.

의학 공부는 군 복무 이후에 해야 했다. 졸업을 하면서 학군단원에게 주는 박대선총장상을 받았다. 중대장 후보생, 대대장 후보생 등의 보직을 잘 수행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그런 내게 학군단 중대장은 화학병과를 추천했다. 화학병과에 가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어떻게든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학군단 중대장 추천에 따라 전문 교육을 받기 위해 화학학교에 갔고 학교장을 면담했다.

“어디에 가고 싶나? 대충 얘기를 들었는데 상무대에서 화학 교관을 하는 건 어떻겠어?”

“아닙니다. 전방에 가고 싶습니다. 소대장으로 복무하게 해주십시오.” 순수한 대답이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스물두 살 젊은 나이의 가식도 있었던 것 같다.

학교장은 세 번이나 되물었다. 내 결심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나는 변함없이 전방에 가겠다고 대답했다.

강원도 양구 쪽에 배치됐다. 자대에 가서 후회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이왕 이렇게 된 일인데 최선을 다해야지.’ 열심히 생활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줄 알았다고 했다. ‘말뚝 박아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런데 제대조차 하지 못할 뻔했다.

제대 4개월을 앞둔 마지막 훈련이었다. ‘야외 기동훈련’에 참여했다. 실제 상황을 가정해 병력과 장비를 기동하는 훈련이다. 텐트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깨웠다. 눈을 떠봤더니 불 속에 내가 있었다. 교대병이 초를 켜놓고 있다가 끄는 것을 깜박했던 모양이었다. 오른쪽 귀와 다리 등에 화상을 입었다. 후에 이를 수습하느라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학군단 생활을 비롯해 장교로서의 생활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정리=전재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