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이영미] 광화문 대통령
입력 2012-12-23 18:51
싸이의 ‘강남 스타일(Gangnam Style)’이 영어사전에 오르더니 신조어 ‘멘붕(men-boong)’은 뉴욕타임스에 진출했다. 연세대 한스 샤틀 부교수는 지난 21일 “(한국인) 학생들이 박근혜의 당선에 완전히 멘붕 상태에 빠졌다고 말하더라”는 체험담으로 시작하는 한국 대선 관전기를 기고했다. 뉴욕타임스까지 거론할 일도 아니다. 주변에 ‘멘붕’ 호소는 널려 있다.
한때 모든 대화를 ‘문재인이 대통령감인 이유’에서 시작해 ‘박근혜 대통령을 보느니 이민 가겠다’로 끝내는 기염을 토했던 친구들은 다양한 반응을 쏟아냈다. ‘모든 걸 잊고 자연에 귀의하겠다’는 체념파, ‘뉴스를 끊었다’는 은둔파, ‘남편을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격정파, ‘세상에 이런 일이’의 망연자실파, ‘왜 (문재인 후보가) 졌는지 모르겠다’는 하소연파, ‘독립방송사를 후원하자’는 행동파도 있었다. 실망, 좌절, 분노, 어이없음, 혼란. ‘박근혜 당선 축하’라는 환희의 한켠에는 감정의 난파선들이 표류하는 모양이다.
선거 후 집단좌절은 예정된 현상이다. 직선제는 4000만명이 한 표씩 던져 최후의 1인을 가려낸다.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감정적인 이벤트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각자의 정치적 감정을 높은 순도로 증류시킨다. 그걸 하룻밤, 한판승부로 털어내고 나면 1000만명이 넘는 패배자, 혹은 패배자의 동조자가 생긴다. 왜 감정의 격동이 없겠는가.
다만 올 대선, 양편 모두 감정이입의 수준이 유례없이 높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평론가들이 지적하듯 박근혜 당선인 지지층의 높은 투표율은 50대 이상 유권자의 경제와 안보 불안을 파워풀하게 보여줬다. 그렇다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넘치는 절망의 언어들은 무엇을 전하는가.
20∼30대 젊은층의 반응 역시 바탕은 불안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청와대로 돌아간다’쯤으로 요약될 것이다. 정치인 박근혜의 힘을 아버지에게서만 찾는 건 억울한 평가다. 그녀는 15년 동안 중앙 정치무대를 누빈 베테랑 정치인이다. 박 당선인을 청와대로 이끈 건 압도적 다수의 영세서민들이었다. 그들을 위해 새누리당에 ‘복지’와 ‘경제민주화’의 새 옷을 성공적으로 입힌 것도 그녀였다.
하지만 그 공을 다 인정한다 해도 박 당선인이 ‘박정희=독재자, 박근혜=박정희의 딸, 박근혜=독재자의 딸’이란 삼단논법을 깨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의문이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그녀의 과거사 인식에 의구심을 갖는다. 박 당선인은 15년간 청와대에서 살았고, 그중 5년을 퍼스트레이디로 일했다. 그런데도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어느 대목에도 아버지의 18년 통치에 대한 평가나 통찰, 반성은 없다.
곧 그녀는 떠났던 청와대로 되돌아간다. 이제 국민은 물을 것이다. 1979년의 청와대와 2013년의 청와대는 어떻게 다른가. 그 질문에 빠르고 효과적으로 답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화가를 아버지로 둔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미적 감각을 습득하는 것처럼 대통령인 아버지를 통해 외교 감각을 익히고 (중략) 노하우를 배웠다” 같은 고백을 돌려 읽으며 쑥덕일 것이다.
상쾌하게 허를 찌르는 방법도 있다. 청와대 대신 광화문으로 가는 것이다. ‘권력의 섬’ 청와대를 광화문 정부중앙청사로 옮기겠다고 했던 건 문 후보였다. 그 공약을 박 당선인이 실천하면 좋겠다. 얻을 건 많다. 국민에게 다가가고, 정치적 포용력도 과시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영미 정책기획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