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태만] 시진핑이 광둥 간 까닭은

입력 2012-12-23 20:17


어느 나라 정치지도자건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수권 후 첫 순방 도시 선정은 다양한 정치적 함의를 상징한다. 지난 11월 14일, 중국 국가 주석직에 오른 시진핑이 그 첫 방문지를 광둥성으로 택한 것은 향후 중국이 갈 길의 일면을 보여준다.

수권 후 한 달 동안 그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정신을 재차 설파하면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실현을 위한 ‘중국의 꿈’을 강조했다. 아울러 작금에 만연한 권력형 부정부패 척결을 통해 국민의 편에 선 ‘서민적 이미지’의 최고 지도자상을 굳히고자 해 왔다.

그는 두 명의 스승을 모시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사회주의 길을 개창해 계급 해방을 이끈 마오쩌둥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개방을 통해 부(富)를 가져다 준 덩샤오핑이다. 시진핑은 마오를 따라 사회주의의 길을 가는 한편, 덩을 따라 개혁·개방을 계속 추동해 갈 것이다.

특히 시진핑이 첫 시찰지로 광둥성 선전(深川)을 택한 것은 향후 그의 정치 노선이 덩을 추수해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정치적 퍼포먼스라 여겨진다. 그도 그럴 것이 선전은 덩이 1984년에 이어 1992년 두 번째 시찰하면서 그 유명한 남순강화(南巡講話)의 핵심인 선부론(先富論)을 발표했던 곳이다. 선부론, 즉 먼저 부를 창출한 국민이 다른 국민을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자본주의를 마다할 필요가 없다는 이론이지 않던가. 이렇듯 지금 시진핑은 덩을 ‘소환’함과 동시에 덩의 긍정적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성공적으로 투영시킴으로써 서민적이면서도 강력한 개혁·개방 추동의 의지를 강조하는 듯하다.

5세대 리더가 이끄는 중국은 많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잠재해 있는 불안요소가 그 어느 때보다 많다. 개혁·개방의 결과로 부의 증가, 비약적 도시화, 넘쳐나는 외환 등의 가시적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극심한 빈부격차, 도농격차, 심각한 지니계수, 농민공 등 속출하는 문제의 해법이 막연한 상황이다. 시진핑의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 지구적 금융위기의 해법도 찾아야 하고, 일본을 앞세워 동아시아로 귀환하는 미국의 군사력에도 수평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2011년 3월 전면 개보수 후 재개관한 국가박물관의 ‘부흥의 길(復興之路)’ 관은 중국 인민들과 지도자들이 걸어 왔던 혁명의 과정을 소상히 전시하고 있다. 시진핑이 굳이 이곳을 찾아 각오를 다진 것은 향후 10년이 녹록지 않을 것임을 절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이 시진핑 임기 종료 마지막 1년을 남긴 시점인 만큼 뭔가 기념비적 성과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중압감도 느꼈을 것이다. 아울러 국민으로부터의 강력한 신임을 위해 부패 척결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실천을 보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중단 없는 개혁·개방만이 ‘중국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동력이라 여겼을 것이다.

지난해에 벌어진, 보시라이를 둘러싼 권력형 부정부패 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부패와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그 칼날이 직전 최고위층에게까지 미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보시라이가 사라지고 없는 마당에 더 이상 ‘충칭모델’이냐 ‘광둥모델’이냐의 문제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충칭도 광둥도 모두 시진핑의 사람들이 수장으로 보임됨으로써 충칭은 충칭대로, 광둥은 광둥대로 새로이 재편될 것이 분명하다.

광둥은 중국 최초로 촌장 직선이라는 민주주의가 실험된 곳이자 경제성장의 상징이다. 이번에 정치국 상무위원 대열에 들지는 못했지만 5년 후 새로이 상무위원에 진입할 것이 확실시되는 후춘화(胡春華)를 네이멍구에서 불러내 광둥성 서기로 보임했다. 리틀 후춘화로 불리며 6세대 리더의 대표주자 중 하나인 그를 발탁한 이유는 그만큼 광둥이 중요하다는 역설이지 않을까.

김태만 한국해양대 교수 동아시아학과